#살림 탐구- 친환경 세제

by 온정

'살림 탐구' 매거진에서는, 집안에 있는 사물을 보고 떠오르는 이야기들을 적습니다 :)



몇 달 전, 부모님의 휴대폰을 바꾸러 전자제품 매장에 갔다. 볼 일을 보고 매장을 나오려는데, 직원분께서 “이거 엄청 좋은 거예요!”를 강조하시며 친환경 세제 세트를 건네주셨다.

기존에 쓰던 세제를 다 쓰고 난 뒤 기분 좋게 친환경 세제를 뜯었다.
“나도 환경에 도움이 되어봐야지!”

그런데,
거품이 안 난다.
식기에 묻은 기름이 도무지 닦이지를 않는다.
설거지하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났다.
설거지할 때 쓰는 물도 두 배가 늘었다.
‘물이라도 뜨겁게 하면 기름이 좀 잘 닦일까?’
물의 온도 역시 최대로 올라갔다.
세제를 짜는 횟수는 셀 수도 없이 잦아졌다.
그 횟수에 반비례하여 나의 인내심은 쭉쭉 떨어졌다.

아,
그러니까 이 세제는 분명 ‘친환경 세제’인데, 친환경일지는 몰라도 ‘세제’는 아니다. 본질을 제대로 잃어버린 세제. 아니, 사실 ‘친환경’의 입지 역시 위태위태하다. 물과 세제를 평소보다 훨씬 많이 썼으니 말이다.

결국 싱크대 아래 선반을 열어 기존에 쓰던 세제를 꺼냈다. 그리고는 친환경 세제와 반씩 섞어서 쓰기로 결단을 내렸다.

설거지 시간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정말이지, 설거지를 하며 행복했던 적은 처음이다.



왜 항상 환경에 좋은 건 불편한 걸까. 평소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편이긴 하다. 두루마리 형태로 되어있어 쉽게 뜯어 쓸 수 있는 반투명 비닐봉지조차도, 결코 쉽게 쓰지 않는다.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플라스틱 빨대를 종이 빨대로 변경했을 때도 나는 환호성을 질렀더랬다. 음료에서 종이 맛이 난다고 누군가 불평을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계면활성제, 그러니까 '거품'만은 도무지 포기가 안된다. 아무래도 아직 친환경 인간이 되긴 글렀나 보다.

+
아. 그래도 이 친환경 세제에 딱 한 가지 장점이 있긴 했다. 내게는 세제 알레르기가 있어서 설거지를 할 때마다 곤욕인데, 이 친환경 세제는 아무리 짜고 또 짜도 콧물이 안나더라는.




DSC06957-01.jpeg 우리집 세제통. Sony a5100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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