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May 15. 2022

키이우가 아닌 타오르미나에서

시칠리아의 그리스 극장에서 만난 아름다운 콘서트

타오르미나(Taormina)에 다녀왔다. 2012년 가을에 방문했었으니 거의 10년 만에 다시 찾아간 셈이다.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같은 땅을 거듭 밟게 만든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간 김에 그리스 극장(Teatro Antico di Taormina/ Ancient Theatre of Taormina)에도 다시 한번 오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래전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 지역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난 곳에 극장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살아 남아 지나간 시간들이 상상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웬만한 희로애락에는 일희일비하지 않을 정도로 나이가 먹을 만큼 먹은 장소라는 사실 외에도 그리스 극장을 방문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이 역사 깊은 장소를 찾은 이들은 무대 너머로 황홀경을 만나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왼쪽은 이오니아해(Ionian Sea)요 오른쪽은 아직도 살아 꿈틀대는 에트나 화산(mt. Etna)이기 때문이다. 이런 호사스러운 배경을 두른 공연장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로마에서 출발한 밤기차에 몸을 싣고 시칠리아 타오르미나에 도착했던 날,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그리스 극장이었다. 관광 성수기는 시작도 안 했건만 거리는 벌써부터 북적이고 있었다. 그 길을 뚫고 지나가길, 벽에 붙은 전단지 한 장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불과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긴가민가했을 터지만 이제는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게 되어버린, 푸른색과 노란색, 우크라이나 국기의 색깔이 선명한 종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궁금해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곳엔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극장에서 우크라이나를 위한 자선 콘서트가 진행된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그것도 바로 같은  저녁에. 그래서 우리는 오전에는 관광객으로서 저녁에는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비는 세계인의 일부로서 같은 장소를 두 번 방문하기로 했다.


《Sound of Peace》라는 제목을 내건 콘서트는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키예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한다. 그랬던 것이 전쟁으로 인해 콘서트 자체가 취소될 위기에 놓였었다고. 그러나 다행히도 타오르미나에서 공연을 할 수 있도록 장소를 내어준 덕분에 우리 가족도 그 아름다운 공연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공연에는 라트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까지 등장했는데 그는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념을 가지고 정성을 쏟아온 일을 하는 순간엔 얼마나 젊어질 수 있는 지를 몸소 보여줬다. 무대에서 연주할 때는 기운차 보이던 노장이 연주를 끝내고 관객석으로 내려가 바이올린이 든 케이스를 끌어안고 앉아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노인 같던지. 그 간극이 놀라워 자꾸만 그에게 눈이 갔다.


우크라이나의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보트비노프(Alexey Botvinov)는 연주에 앞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키이우에서 예정되었던 콘서트가 어떻게 타오르미나에서 개최되게 되었는지 자신의 조국의 상황은 어떤지를 이야기했고 그 자리에 함께 한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날의 선곡도 선곡이었지만 우크라이나에 분명 가족도 친척도 친구들도 있을 그가 유럽의 남쪽 끝, 시칠리아에서 깨끗하게 다림질한 연미복을 빼 입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가늠해 보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팬데믹 이후 첫 유럽 여행이어서 그랬는지 이번 이탈리아 여행은 유독 즐거웠다.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인류의 귀한 문화유산을 만나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고 맛난 음식을 먹고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지인들을 만나 많이 웃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가 한 톨의 걱정도 없이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같은 순간,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도 많다는 사실을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여행했던 도시들에선 우크라이나의 국기를 내 건 집이며 상점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덕분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즐거운 마음을 비집고 문득문득 미안한 마음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가 우크라이나 출신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보트비노프




타오르미나 그리스 극장 전경과 음악회 리허설



Sound of Peace concert PART 1: 시네마 천국 OST



Sound of Peace concert PART 2



Sound of Peace concert-Gidon Kremer(기돈 크레머)


작가의 이전글 여행하는가족, 유튜브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