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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May 25. 2022

2022년 이탈리아 여행의 서막

Inner peace...제발 좀, inner peace...

로마 공항에 도착해 핸드폰을 켜자마자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냅다 전화벨이 울린다. 누구지?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내가 사는 아파트의 관리인이었다. 이 사람이 나에게 먼저 연락할 일이 없을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일까? 전화를 받기 전부터 이미 느낌이 싸했다. 그리고... 아, 나 돗자리 깔아야 하나? 10초도 지나지 않아 그 느낌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덮치고야 말았다.


"지금 당신 집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공용 복도가 다 젖을 정도로요. 마스터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상황 파악을 해도 될까요?"


이럴 수가... 두바이에서 로마까지, 여섯 시간 하고도 십오 분을 날아와 이제 막 착륙을 한 참인데, 내 엉덩이는 아직도 비행기 좌석에 붙어 있는 상황인데 지금 이거 실화인가요?


쏟아져 나온 물이 우리 집을 벗어나 공용 공간까지 침범했을 정도라면 당장 문 따고 들어가야지. 마음은 몹시 심란했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그럼 그렇게 해주십사, 대신 어떤 상황인지 영상이랑 사진으로 찍어서 자세히 좀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관리인은 흔쾌히 오브 코올스, 확인하고 연락 주마고 답을 했다.


그 자리에 없으니 지금 우리 집이 어떤 상태인지 알 길이 없기에 나는 머릿속으로 물이 터질만한 장소를 짐작해보기 시작했다. 어떤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왔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여행을 떠나올 때면 온 집안의 전기기구를 콘센트에서 다 빼내고 차단할 수 있는 전원은 다 차단하곤 하는데 혹시 이번에 깜빡한 곳은 없는지도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오력을 하고 또 해봐도 쉽사리 걱정을 떨쳐버리기는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몇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브 코올스 바로 답을 다던 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연락을 해보니 자기가 이프타(라마단 기간, 무슬림들이 해가 진 후에 먹는 첫 식사) 중인데 밥 좀 먹고 연락을 주겠단다. 나는 우리  상황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지만 그래, 뭣이 중헌디, 사람이 밥은 먹어야지 싶어서 그렇게 해달라고 답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10일이 흘렀고 우리 가족이 다시 두바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도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할 말은 많지만 결론으로 직행해 보자면, 그날, 우리 집의 수도관이 터져 난 물난리로 인해 젖거나 고장 난 물건들은 아직도 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인데 놀랍게도 오늘 저녁, 짐을 보관하는 방에 우연히 들어간 내 귀에 똑 똑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급하게 사방을 둘러봤다. 천장 한구석에서 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그 아래쪽 짐들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아놔. 나 원래 이런 사람 아니지만 이번엔 아파트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17 다음에 오는 숫자를 외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프타를 장장 10일 동안이나 즐겼던 게 분명한 아파트 관리인 아저씨가 그래도 오늘은 사람을 비교적 빨리 보내준 덕분에 사태를 대충이나마 수습할 수 있었다. 젖어버린 책들이며  버릴 생각이 없었던 잡동사니들을 몇 박스 분량이나 내다 버리는 내 마음은 찢어졌지만!


로마 공항에 도착했던 날, 차분하고자 했으나 심란할 수밖에 없는 내 얼굴을  여행이가 말했었다. 엄마가 지금 걱정을 해도 어차피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집에 못 돌아가니까 일단 즐겁게 노는 데 집중하라고. 이 어미가 알려준 집중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또 찰떡 같이 써먹는구나.


그래, 하지만 여행이 네 말이 맞다. 오늘 일도 마찬가지다. 이미 벌어진 일, 생각해 봤자 속만 터지니 어찌하리오. 우리 집 꼬마 현자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수도관 파열과 함께 시작된 이탈리아 여행 첫날, 로마에서의 영상을 무념무상으로 편집했다. 이 정도면 나도 나름,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 하아... 그런데 왜 나는 이 밤이 깊어가도록 잠을 못 이루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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