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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7. 2020

어느 멋진 가을날

그렇게 뉘하운을 걷는다


가을에 북유럽을 방문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라 이 동네의 9월 날씨가 어떤지 감을 잃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덴마크 코펜하겐(Copenhagen)에 도착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북유럽의 가을이 이런 거였지.


어디에선가 대박이라는 말을 억양까지 유행하는 그대로 배워 온 48개월 여행이도 코펜하겐의 공기를 들이마시자마자 소리쳤다.




"여긴 정말 추운 나라다. 대~박!"




겨울용 점퍼와 모자 없이는 정신까지 얼얼해질 정도로 추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코펜하겐에 왔는데! 게다가 하늘이 이렇게나 맑은데!

그리하여 우리는 중앙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숙소를 용감하게 박차고 나와 코펜하겐 거리를 산책하기 시작했다.




슬렁슬렁 걸어 도착한 곳은 뉘하운(Nyhavn). 덴마크어로 새로운(Ny) 항구(havn)라는 의미다. 그러고 보니 한국어로는 코펜하겐으로 알려진 이 도시의 이름도 덴마크어로는 København으로, 양쪽 모두에 'havn', 즉, '항구'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코펜하겐은 12세기 중반, 해양 물류의 중심지로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뉘하운은 그렇게 커진 이 도시에 새로 생긴 항구라 해서 '새로운 항구', 즉, 'Nyhavn'으로 이름 붙여졌단다.


덴마크 국왕이었던 크리스티안 5세는 새로운 운하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후 17세기 중반 벌어진 덴마크와 스웨덴 간 전쟁에서 생포된 스웨덴인 포로들을 시켜 뉘하운을 건설했다 한다. 이후 코펜하겐과 바다를 잇는 관문 역할을 맡아온 뉘하운. 한때는 매춘으로도 악명이 높았다는 이곳이 이제는 코펜하겐을 대표하는 관광지가 되었다.




오늘날의 뉘하운 거리에는 레스토랑과 바가 줄지어 들어서 있다.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깔을 뽐내는 건물들이 운하를 따라 들어선 까닭에 포토스폿으로도 인기가 높다.


사진이 잘 나오는 지점에서는 손에 손에 카메라를 든 이들이 줄을 서 나 여기 왔다 가오라며 인증샷을 찍는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을 감당해 내야 하기에 인증 셀카를 찍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집을 나설 때는 제 발로 걷겠다는 의지가 충천한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문을 열고 나와 한 두 걸음만 걷고 나면 두 팔을 양쪽으로 쭉 펴고는 "엄마, 안아줘!"를 외치던 우리 집 꼬마는 주로 유모차에 앉아 뉘하운을 산책했다. 그래....네가 언제까지 유모차를 타겠니.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렴. 다행히 뉘하운 거리를 포함한 코펜하겐의 길은 울퉁불퉁한 자갈이 깔린 곳이 대부분이지만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기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라 곧 사십을 바라보던 우리 부부도 경쾌하게 산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뿐하다, 가뿐해!



아...가뿐한 줄 알았는데 왜 이리 당이 당기지?


우리는 그곳의 한 아이스크림 가게에 앉아 각자 좋아하는 맛을 골라 아이스크림을 한 개씩 해치웠다. 이제 겨우 가을이 시작되는 서울에서 날아와 코펜하겐의 초겨울 날씨에 혼이 빠진 주제에 무슨 생각으로 아이스크림 먹을 생각을 다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뉘하운 거리를 바라보며 먹는 아이스크림은
그 거리만큼이나 알록달록한 맛이었다.




뉘하운 끝자락에서 벼룩시장을 발견했다.



떨어트리면 안돼. 그거 십만원이란말이야.


새 물건을 사는 것도 재미있지만 누군가에게 사랑받던 손때 탄 물건을 고르는 재미에 비할 순 없다. 그 맛에 우리 부부는 중고물품 벼룩시장을 사랑하는데 그런 엄마 아빠의 피를 이어받은 여행이도 좌판에서 제 마음에 드는 것을 냉큼 하나 골라냈다. 하필 그게 십만 원도 넘는 망원경이라 '너에게 꼭 맞는 어린이용 망원경'을 찾아 사주겠다는 말로 간신히 설득했다.


지금 당장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해 여행이는 얼마나 구슬프게 울었던가. 그게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어느덧 여행이는 미래의 만족을 위해 현재의 불만족을 견뎌낼 수 있는 아이로 자랐다.


여행을 할 때마다
여행이가 한 뼘씩 자라는 게 눈에 보인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일상을 사느라 잊고 지냈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코펜하겐에 얽힌 추억이 하나, 둘 떠오른다.


이십 대 초반의 나와 동생이 코펜하겐 재즈 페스티벌을 보러 갔던 날, 엄마와 둘이 걷던 길들, 스웨덴에 살던 시절 친구들과 기차 타고 주말여행을 와서 스웨덴에 비해 북적이는 시내를 보고 신이 났던 우리들.




모두 다 어느덧 이십 년 전 과거의 일들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그 과거 덕분에 오늘의 내가 미소 짓고 있다.


우리 가족이 함께 뉘하운을 산책했던
어느 멋진 가을날의 순간들도
미래의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해 줄테지?


-2018년 9월, 덴마크 코펜하겐-


◇ 여행팁 ◇

● 뉘하운(Nyhavn)은 1658년에서 1660년 사이에 벌어진 덴마크와 스웨덴의 전쟁에서 생포된 스웨덴 포로들에 의해 건설되었다. 콩엔스 뉘토브(Kongens Nytorv) 광장과 바다를 잇는 관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뉘하운은 동시에 술과 매춘으로도 악명 높았던 곳이란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이 1845년부터 약 20년 간 뉘하운 지역에 거주하기도 했다. 뉘하운에서 유럽 3대 허무 시리즈 중 하나라는 우스갯소리로도 유명한 인어공주 동상까지는 걸어서 약 20분이 소요된다. 코펜하겐 중앙역까지도 도보로 30분이면 닿으니 덴마크의 일상을 즐기며 천천히 걸어보는 것도 좋을듯하다.
주소: Nyhavn 1F, 1051 København K, Den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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