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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7. 2020

세월의 거리, 추억의 자리

아일랜드 위클로 그렌다로그 산책길에서

아일랜드 동부, 수도인 더블린(Dublin)에서 남쪽 방향으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거리에 글렌다로그(Gleann Dá Loch, Glendalough)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이 낯선 이름은 두 개의 호수를 이루는 골짜기(Valley of two lakes)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더블린에 살고 있던 사촌언니 부부는 아일랜드에 왔다면 글렌다로그엔 꼭 한번 가봐야 한다고 했다. 더블린에서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멀지 않은 데다 역사와 자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이유였다.

여행 계획은 급하게 세워졌다. 사촌언니 부부만 믿고 자동차조차 빌리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언니네 차를 얻어 타고 함께 이동하기로 했다. 당시 우리 일행은 사촌언니 부부와 우리 부부뿐 아니라 아직 걷지 못하는 여행이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여행이의 사촌 누나,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는 사촌 형아, 이렇게 도합 일곱이었다. 짐칸에 실려 있던 필요 없어 보이는 짐을 빼 차고로 옮기고 뒷좌석에 접혀 있던 의자들을 폈다. 성인 네 명이 그렇게 한동안 애를 쓴 끝에 드디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사람도 짐도 워낙 많이 태운 탓에 우리의 차는 묵직한 소리를 내며 더블린을 출발했다. 서로 끼어 앉아 몸은 불편했지만 오랫동안 서로 다른 나라에 떨어져 사느라 만나기 어려웠던 사촌언니 부부와 실제로는 처음 만난 조카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길이 즐겁지 않을 수는 없었다.



6세기, 성 케빈(St. Kevin)은 자신이 어렸을 적 방문했던 글렌다로그로 돌아와 수도원을 지었다 한다. 많은 이들이 성자의 명성을 따라 이 계곡으로 들어왔고 수도원은 이후 여섯 세기 동안 번창한다. 그러던 것이 14세기 영국군에 의해 파괴되어 이제는 유적으로만 존재하게 되어버렸단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글렌다로그는 여전히 폐허인 채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으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풍길 것도 같았지만 존경받던 성자가 이끌던 수도원이 있던 장소라 그런지 전반적으로 성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지긋하신 몇 이 벽체 일부만 남은 건물이며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제멋대로 꽂혀 있는 묘지석 주변을 천천히 걷는 게 보였다. 가끔씩은 그곳에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을 살피려는지 그분들은 얼굴을 묘지석 가까이 끌어당기고 미간에 주름까지 잡아가며 무언가를 한참 동안이나 살펴보곤 했다.



우리는 신비스러운 색조를 뽐내는 자연 속 길을 따라 호수로 향했다. 한 아이는 걷고 또 한 아이는 유모차를 타고 나머지 한 아이는 힙시트에 앉아 그 길을 함께 했다.


갓난아기 시절 한국을 떠난 사촌 언니는 몇 년에 한 번씩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어렸을 적엔 언니가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지 못해 속상한 적도 있었다. 언니는 우리 자매와 사이좋게 놀 때는 한국어를 썼지만 우리 둘과 싸우고 난 후엔 언니만 아는 그 언어로 종이에 무언가를 끼적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심통이 나서 크레파스도 종이도 언니와 나누어 쓰지 않으려고 버티던 내가 얄미웠었는지도 모르겠다. 난 내가 모르는 그 말이 영어인 줄 알았다(그땐 외국어는 다 영어인 줄 알았다). 그래서 학교에 들어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영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어 뒤돌아보니 다 귀엽고 그리운 추억이다.



언니는 아직도 한국어를 할 수는 있지만 그것보다는 영어나 어린 시절의 내가 영어로 착각했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더 편한듯했다. 그래서 30대가 되어 다시 만난 우린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게 되었다. 우리를 갈라놓았던 시간과 공간의 존재가 느껴졌다.


목적지인 호수에 도착해 세 아이를 땅에 내려놓았다. 아이들은 신나게 기어 다니고 걸어 다니고 뛰어다녔다. 언니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괜히 더 심술을 부리던 내 어린 시절의 날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함께 철없던 20대 시절, 한국어를 공부하러 왔던 사촌 언니와 몇 달을 한 집에 살면서 신나는 하루하루를 보내던 것도 이제는 저 먼 기억 속 추억이 되었다.


곧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어 헤어졌는데 날로부터 어느새 6년이라는 시간이 흘러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와 결혼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일 이야기를 나누며 글렌다로그 오솔길을 걷던 날도 호숫가에서 서로의 가족사진을 찍어주던 순간도 이제는 다 그리운 추억 속 한 장면이 되어버린 것이다.


◇ 여행팁 ◇

● 아일랜드의 수도이자 관문인 더블린(Dublin)에서 글렌다로그(Glendalough)까지는 차로 약 1시간 거리다. 오래된 수도원 터와 빙하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아름다운 자연이 인상적인 여행지.
주소: Glendalough, Bray, Co. Wicklow A98 HC80, Ireland
웹페이지: https://www.glendalough.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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