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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29. 2022

사전을 찾는 법

이탈리아 파도바 <파도바 대학 도서관>

결혼 후 십 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우리는 여덟 번이나 보금자리를 옮겼다. 게다가 그중 세 번은 국제 이사였으니 우리 참 멀리, 자주도 옮겨다니긴 했다. 미니멀리스트보다는 맥시멀리스트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이사를 앞두고는 나도 물건을 정리한다. 분명 고심해서 고른 것들이었을 텐데 몇몇은 이사라는 냉정한 현실 앞에서 내쳐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다.


내 학창 시절, 사전은 그저 책장에 꽂혀있기만 하던 물건이 아니었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국어사전도 펼쳐보고 영어 사전도 펼쳐보며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찾아보곤 했었으니까.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로 마음을 먹고 나면 장비부터 마련해야 마음이 편하니 일단 그 언어 사전부터 구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것들이 초등학교 시절 나의 부모가 사주셨던 손바닥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사전부터 시작해, 머리가 굵어진 후 손에 넣은 조금 더 두꺼운 국어사전과 고등학교 영어 선생님께서 추천하셔서 구매했던 롱맨 영영사전을 거쳐 외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쟁여놓은 독일어 사전, 일본어 사전과 스웨덴어 사전, 여기에 스페인어 사전까지 추가되면서 어느덧 내 책장 한 줄이 사전만으로 꽉 채워질 정도가 되어버렸다.

시작은 창대하나 결과는 미약했던 탓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그것들은 이후 인터넷 사전이 등장하면서 더욱 존재감을 잃었고 그렇게 먼지만 쌓여가던 중 이사 준비 칼바람에 하나, 둘 스러져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과정을 외국에서 시작한 우리 아이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모국어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책을 아이와 함께 읽어오고 있다. 독서를 하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아이는 곁에 앉은 나에게 그 의미를 묻곤 하는데 내가 아는 선에서 열심히 설명해 주다가 어느 날엔가는 문득 사전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친김에 사전 찾는 법을 알려주려고 했는데 이럴 수가, 이제 우리 집에는 사전이 한 권도 없다! 나조차도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종이사전을 뒤적일 생각은 아예 떠올리지도 않고 바로 인터넷 사전으로 직행하는 마당에 해외 이사를 오면서까지 사전을 챙겨 왔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이는 더하다. 단어를 찾을 때 손가락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아이패드로 수업을 하면서 기계와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해진 것일까? 모르는 게 있으면 손으로 검색어를 입력하지 않고 시리(Siri)를 부른 뒤 알고 싶은 것을 검색해 달라고 말한다.


와, 내가 생각해도 이런 세상에 종이 사전은 고루하다. 너무 고루하다는 거 나도 잘 알고는 있는데 문제는, 나는 가끔 그 고루함이 그립다.


베네치아에서 서쪽 내륙지방으로 사십 여 분을 달리다 보면 파도바(Padova, Padua)라는 도시가 나온다. 이탈리아에는 매력적인 곳들이 너무나도 많기에 여행자들의 방문 리스트에서는 살짝 비켜난 곳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세계 최초의 식물원이라는 파도바 식물원이 있고 매년 수많은 순례객들을 불러 모으는 파도바의 안토니오가 모셔진 성 안토니오 성당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도바 대학교가 있다.


1222년에 설립된 파도바 대학교는 볼로냐 대학교에 이어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대학 중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역사가 긴 곳이라고 한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오, 대단한데 라는 생각이 드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이 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었고 졸업생 중에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도 있단다. 이건 뭐, 세종대왕 교수로부터 배움을 얻고 퇴계 이황이랑 오빠, 동생 해가며 같이 공부하는 거랑 비슷한 건가?


우리는 파도바 대학교 방향으로 천천히 걷기로 했다. 역사 깊은 도시를 산책하다 보면 신기하게 심심하지가 않다. 오래전 누군가가 하나하나 손으로 박아 넣어 만들었을 돌길,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보다 어쩌면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를 아름드리나무가 드리운 그늘. 눈 닿는 모든 것들이 제각기 품어온 긴 긴 이야기를 나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아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 보면 심심할 틈이 없다.


목적지는 파도바 대학 도서관(Biblioteca Universitaria Padova, Universty Library of Padua)이었다. 17세기에 개관한,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도서관이었다던 이곳은 지금은 더 이상 파도바 대학교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한다. 덕분에 여행자일 뿐이었던 우리 가족도 특별한 제약 없이 도서관 내부를 둘러볼 수 있었다.


도서관은 아주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딱 본연에 충실한 대학 도서관 같은 분위기로 솔직히 말하자면 꽂힌 책들도 자아, 어디 하나 뽑아 읽어볼까 싶게 생긴 게 없다. 하지만 책등이 다 벗겨져 제목조차 읽기 힘들어진 책 앞에서 나는, 나보다 먼저 이곳을 방문했었을 과거의 수많은 이들을 상상해본다.


책등이 다 벗겨져 제목조차 읽기 힘들어진 책 앞에서 나는, 나보다 먼저 이곳을 방문했었을 과거의 수많은 이들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책장을 훑던 나의 눈이 한 곳에서 멈춘다. 거기엔 다름 아닌 사전들이 꽂혀 있었던 까닭이다.


"이것 봐라. 여기 사전이 있네?"


나의 이야기에, 제 부모의 취미생활 때문에 이제껏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난다. 사전 사용법을 말로만 배운 아이가 드디어 종이 사전을 처음으로 만져보게 될 날이다. 앞부분은 영어를 프랑스어로, 뒷부분은 프랑스어를 영어로 설명해 놓은 그것은 꽤나 묵직해 우리 둘은 끙차 힘을 합쳐 뽑아 들고는 가까운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 그럼 이제부터 사전 찾기 실습에 들어간다! 준비됐습니까? 넵! 준비됐습니다!!


아이는 한 해 전부터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일주일에 한 시간일 뿐이지만 그간 배운 단어들이 제법 있는지 자기가 아는 언어들로 채워진 사전을 보고는 벌써부터 신이 난 눈치다. 아이의 몸만큼이나 커다란 사전 안에는 A부터 시작해서 Z를 향해 가는 단어의 물결이 흐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는 단어를 낚는 어부가 된 듯 조심스레 책장을 넘기고 더듬더듬 글을 읽어 나간다.


엄마 목소리를 듣는 게 좋다는 아이는 한글을 깨치고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지금까지도 종종 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그러면 그 귀여운 것이 언제까지나 내 곁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시간이 귀한 나는 기꺼이 책을 든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여전히 나에게 가장 먼저 묻는다. 엄마, 이게 무슨 뜻이야?라고. 그러면 나는 후유- 내가 알고 있는 단어를 물어봐줘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하며 내 머릿속의 이야기를 아이에게로 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늘 갓난아기 같았던 나의 아이가 이제는 스스로 책을 읽을 수 있고 그러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혼자 힘으로 종이 사전을 찾아 궁금증을 해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시간이 가고 아이는 자란다. 그 과정에서 아이에게 사전을 찾는 법을 알려줄 수 있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을 나누어 줄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


사전을 뒤적이는 나와 아이의 모습을 남편이 사진으로 남겨주었다.

파도바 대학 도서관(Biblioteca Universitaria Padova, University Library of Padua)

주소: Via S. Biagio, 7, 35121 Padova PD,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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