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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30. 2022

함께 읽는 마음

아랍에미리트 샤르자 <하우스 오브 위즈덤>

태어난 지 10개월 반 밖에 안 된 아이가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가던 날, 나는 부모와 떨어지기 싫어 울던 아이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남편의 육아휴직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나도 복직을 해야 했다. 언젠가 보내야 할 곳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보내는 것이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들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전혀 위안이 되지 않았다.


아침에는 남편이 저녁에는 내가 주로 육아를 맡기로 했다. 아이를 한시라도 빨리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나오고 싶었던 나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근무시간을 바꿨는데 새벽마다 잠도 덜 깬 아이가 엄마, 엄마 울며 매달리는 것을 떼어내고 출근하는 길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워 그 새벽, 지하철을 타러 걸어가는 길목에서 사연 많은 여자처럼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뿐이랴. 오후에 다시 내 얼굴을 본 아이가 엄마~라고 부르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로 나를 울컥하게 만들곤 했다.


그즈음 나는 사실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나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은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일주일 중에 무려 5일 동안이나 새벽에 헤어져 저녁 먹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미안한 마음의 시작이었기 때문이었겠지.


매일 밤 잠자리에 누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한 것도 내가 아이에게 건네는 사과였을 것이다. 물론 나와 남편이 책 읽기를 즐기니 우리의 아이에게도 같은 취미를 물려주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겠지만.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이 분명한 아주 어린 시절에도 아이는 포근한 밤을 배경으로 울려 퍼지는 엄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같았고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새벽에 시작된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고 밤이 되면 책을 쥔 나도 잠을 이겨내기 힘들어 정말로 가끔은 책에 쓰여있지도 않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다가 내 황당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깨버리는 날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란히 누워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시간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로 발령이 난 남편을 따라 옮겨오게 되면서 나는 결국 퇴직을 다. 이번에는 출근을 해야 해서 우는 게 아니라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어 눈물이 났지만 언젠가는 갈 어린이집에 아이를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보낸 것처럼 언젠가는 할 퇴직, 남들보다 조금 일찍 하고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보자고 힘을 내보는 중이다. 나의 커리어는 이렇듯 갈 곳을 잃었지만 이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로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언제까지나 트럭을 아뜨러라고 발음하고 우유를 아르라고 발음하는 꼬마일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덧 훌쩍 자라 초등학생이 된 나의 아이와.


두바이 도심에서 자동차로 30분이면 닿는 샤르자(ٱلشَّارقَة, Sharjah)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2002년)와 레바논의 베이루트(2009년)에 이어 중동 지역에서는 세 번째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된 도시다. 샤르자를 향해 운전대를 잡았던 어느 주말 아침, 우리의 목적지는 단 하나였다. 바로 하우스 오브 위즈덤. 도서관이자 문화센터로서의 역할을 하는 이 공간은 샤르자가 지난 2019년, 세계 책의 수도로 선정된 것을 기념해 세워졌다고 한다.


잠시 고대 세계로 여행을 떠나보자. 하우스 오브 위즈덤(House of Wisdom), 혹은 그랜드 라이브러리 오브 바그다드(Grand Library of Baghdad)는 기원후 8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슬람 세계를 지배했던 아바스 칼리파국(Abbasid)의 도서관이자 연구기관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13세기 중반에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바그다드가 전쟁터가 되어버렸고 그 과정에서 하우스 오브 위즈덤도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만다. 이런 까닭에 그것의 존재는 몇몇 학자들이 남긴 기록에만 남아 있다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손에 잡히는 증거가 없으니 이 전설 속 장소가 실재했었는지, 만약 그랬다면 정확히 어떤 역할을 담당했었는지에 대한 의견이 아직도 엇갈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르겠다.


놀라운 사실은 이 고대의 기관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후에도 이슬람 세계의 도서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 그렇기에 오늘날까지도 이 세계의 많은 도서관들이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샤르자의 하우스 오브 위즈덤 또한 예외는 아니란다.


사실, 우리 가족을 이곳으로 이끈 것은 독특한 도서관의 이름도, 이곳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도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우연히 마주한 사진 몇 장이 우리를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나는 대뜸, 이게 정말 도서관이 맞나 하는 의심부터 들었다. 눈 맛 시원한 철근 구조물과 외부의 풍경을 도서관 내부 깊숙이까지 고스란히 끌어들여오는 커다란 창의 조화가 단연 눈에 띄는 건축물이었다. 알고 보니 런던 국제공항을 비롯해 홍콩, 그리고 베이징 국제공항의 설계를 담당했던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Foster + Partners)가 건축을 맡았단다. 요즘은 워낙 사진을 잘 찍는 분들이 많아 SNS를 통해 감탄했던 장소에 직접 가보면 실제보다 못한 현실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도 많은데 하우스 오브 위즈덤은 실망은커녕 사진이 실제의 아름다움이 다 담지 못했구나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그림 같았던 도서관
도서관 내부 중앙에 자리한 정원

우리 부부와 함께 2층을 구경하던 아이가 무얼 발견했는지 갑자기 몸을 홱 틀더니 1층으로 달려 내려간다. 그것을 부랴부랴 따라 내려가 보니 아이가 멈춰 선 곳에는 어린이 전용 서가가 있었다. 폭신한 소파와 간단한 놀잇감은 물론, 내 어린 시절의 로망이었던 벙커침대까지 준비된 사랑스러운 공간이. 하나밖에 없는 귀한 벙커침대를 차지한 아이는 그곳에 배를 깔고 누워 스스로 골라온 책을 읽다가 뒤늦게 나타난 나에게도 이리 와 자기 옆에 누우란다. 우리 둘의 한밤의 독서가 떠올라 냉큼 드러눕고 싶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공간에 웬 아줌마가 올라가 있는 건 미안한 일이라 나는 그 옆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해서 그런지 집에서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엉덩이 무겁게 앉아 책을 읽곤 한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꼭 나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하는 바람에 정작 나는 내가 읽고 싶은 책은 거의 살펴보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가만 보자,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랬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우리 아이, 그새 또 훌쩍 자랐구나. 이제 도서관에서도 나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는 대신 스스로 읽고 있는 것이다. 바라던 대로 아이가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도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는데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 왜 이리 아쉬운지 모르겠다. 갈팡질팡 엄마의 마음이여.


하우스 오브 위즈덤 외부에는 정원이 있는데 해 질 녘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즈음이면 특히나 더 그 빛깔에 물든 풍경이 황홀할 정도로 멋있는 곳이다. 그곳엔 조각가, 게리 주다(Gerry Judah)의 거대한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고대의 두루마리가 회오리 형태로 둥글게 말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솟아오른 탑 모양이다. 과거에는 종이를 얻는 일도 그 위에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새겨 넣는 일도 엄청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을 통해 인류는 경험과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해왔고 두루마리로 시작된 그것은 인쇄된 책과 이제는 전자책의 형태로도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평범한 개인으로서 내가 내 아이에게 경험과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경험과 지식을 아이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매체인 책,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 정도는 엄마인 나도 전달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내 아이도 자신의 아이에게 함께 읽는 마음을 나누어 주게 되길 바라며, 오늘 밤에는 어떤 책을 함께 읽을지 고민해 봐야겠다.


해 질 녘의 하우스 오브 위즈덤은 특히나 더 아름답다.

하우스 오브 위즈덤(House of Wisdom)

주소: Al Juraina 1, Sharjah, U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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