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태평성대

by 여행하는가족


두바이의 겨울, 여행자

두바이를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겨울이라고들 한다. 12월이 되면 드디어 낮 최고 기온이 20도대, 최저 기온은 10도 중후반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온화한 날씨가 3월까지는 유지되는 까닭에 그야말로 여행하기 가장 적합한 시기라 할 수밖에. 고난의 계절을 이겨낸 이들은 겨울이 되면 밖으로, 밖으로 뛰쳐나간다. 그리곤 외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즐기고 바깥세상을 구경한다. 우리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변 풍경을 병풍으로, 하늘을 지붕으로 하는 테이블에 앉아 두바이에 살 때나 먹어보지 언제 다시 먹어볼까 싶은 아라비안 스타일 요리를 한 상 가득 주문하고 챙겨간 책을 뒤적이다가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 비타민이 듬뿍 채워지는 기분. 두바이의 겨울은 우리에게 그런 기쁨을 선사했다.


한국의 초가을 날씨를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계절, 나는 혼자서라도 종종 나들이를 다녀오곤 했다. 겨울은 관광 성수기인 만큼 집을 나서는 시간이 늦어질수록 그날의 목적지가 붐비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출근하는 남편과 등교하는 아이의 발걸음에 맞춰 새벽부터 부지런히 외출 준비를 했다. 영원하지 않을 게 분명한 귀한 시기를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누군가의 배우자이자 누군가의 엄마로서만 살아가는 요즘의 내 삶이 공허하다는 생각이 내 흔들리는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두바이의 여름, 그리고 여행자

두바이로 이사를 오기 전 나는, 이 도시에 살고 계신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무시무시한 여름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었는데 일 년 중 가장 더운 그 시기엔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나를 향해 헤어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을 튼 것만 같은 비현실적인 뜨거움이 덮쳐온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그동안 고온다습한 기후를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도 아니니 두바이의 여름쯤이야. 마음 단단히 먹으면 견뎌내지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건만 후아, 이곳의 더위라는 것은 인간이 마음을 먹는다고 간단히 이겨낼 수는 없는, 말하자면 내 고국의 폭염을 상쾌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이었다. 두바이의 첫여름은 그토록 힘겨웠다.


여름이 지나고 짧은 가을이 지났다. 이어 겨울의 하루하루가 모여 왔다 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짧은 봄이 되었고 곧이어 여름이 찾아왔다. 두바이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여름이.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도 사람인지라 여름을 맞이하는 것이 더 이상 처음처럼 버겁지는 않다. 그래서 나는, 겨울에 하던 바깥나들이를 여름이 되어서까지 이어하고 있다. 이런 날씨의 두바이에서 누가 바깥을 돌아다니나 싶었는데 그게 바로 내가 될 줄이야.



내 인생의 태평성대

몇 년 전 서울 이촌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태평성대를 그린 우리네 옛 그림을 본 적이 있다. 제목과 설명을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태평성대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게 만드는 그림이었다.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전시장 한 면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화폭 안에는 한 마을의 풍경이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들 무언가를, 그러니까 그것이 일이든 놀이이든 각자만의 할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분주하게 돌아가는 그 세상은 활기가 넘쳤고 기쁨이 엿보였다.


두바이로 이사를 온 후 종종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퇴직서를 내고 갑작스레 경력이 단절되어 버린 지금의 내 모습에 마음이 허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이 앞으로의 내 삶에 분명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낯선 곳을 방문하고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맛보고 인종과 국적과 종교가 다른 이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솟아날지도 모른다고. 그런 마음으로 나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의 설득이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지만, 동영상을 보는 것에 흥미가 없어서 유튜브 아이디도 없던 내가 유튜브 채널을 만들고 지난 우리 가족의 여행을 기록하기 시작하기도 했다. 언젠가, 언젠가는 이라며 미뤄두기만 하던 세계문학전집 전권 읽기도 이곳, 두바이에서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려 노력하면서 나는 자주, 그때 그 태평성대를 그린 그림을 떠올린다.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 요요인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인생이라는 나라의 왕은 나이므로 내 인생의 태평성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나 자신일 터.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다시 한번 끙차!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앞으로의 내 인생, 아니, 지금 당장부터의 내 인생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기고처] 브릭스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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