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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18. 2020

소세키와 시키의 글을 따라

에히메현 마쓰야마 여행



기요 할머니는 무슨 인연이 닿았는지 나를 몹시 귀여워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마저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에 나한테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고 했다. 아버지도 나만 보면 늘 몸서리를 쳤다. 동네에서도 쌈박질 악동이라고 아예 내놓았다. 그런 나를 기요 할머니는 무턱대고 예쁘게만 봐주었다. 나는 어차피 사람들에게 예쁨을 받기는 다 틀렸다고 포기했던 터라 남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 도리어 기요 할머니처럼 애지중지 해주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기요 할머니는 이따금 부엌에서 남들이 안 볼 때 "도련님은 대쪽같이 곧은 성품이에요."하고 칭찬해 주곤 했다.




오래전, 엄마가 방에 놓아두신 책 한 권을 우연히 발견해 읽은 적이 있었다. 일본의 소설가인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Natsume Sōseki)가 쓴 『도련님(坊っちゃん)』이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 그 길지 않은 이야기는 내 마음에 긴 자국을 남겼다.




그때부터 나는 소설의 배경이 된
일본 시코쿠(四國) 지방,
에히메현(愛媛縣) 마쓰야마(松山)에
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마음을 먹은 날로부터 한참이 흐른 후에야 마쓰야마로 향할 수 있었다. 시코쿠 지방은 일본에서도 외진 곳으로 여겨진다는데 한국에서부터 가는 길도 수월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에어서울이 일본 소도시 직항편을 운항하기 시작했을 때 마쓰야마행도 생겨났고 그제야 좀 가벼운 마음으로 그 도시엘 다녀오기로 한 것이었다.


여행은 친정 부모님과 함께하기로 했다.


처음 이 도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친정 엄마 덕분이었고 나만큼이나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언젠가 나에게 "마쓰야마에 가서 봇짱(도련님) 열차도 타고 도고온천에도 가보고 싶다."라고 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는 내가 이십 대 초중반이었을 때까지 둘이서 배낭여행도 다니고 그랬다. 이후로도 가끔 함께 여행을 하긴 했지만 마쓰야마 여행 중엔 어쩐 일인지 함께 노르웨이 피요르드를 보러 가고 내가 좋아하던 덴마크 작은 마을도 둘러보고 스웨덴에서 내가 살던 동네를 산책하던 그 시절의 엄마가 떠올랐다.


마쓰야마에서 만난 육십 대의 우리 엄마.
여행은 즐거웠지만 이제는 엄마가
연세가 많이 드셨구나라는 생각에 슬펐다.
엄마보다 연세가 더 많으신
아빠에 대해서는 더 말해 무엇해.



실제로 운행되는 봇짱열차


도고온천은 밤이고 낮이고 사람들로 붐빈다.


엄마와 내가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던 봇짱열차는 정해진 시간에만 탑승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미리 운행시각을 체크해 줄까지 선 후 그 정겨운 모양새의 열차를 타고 마쓰야마 시내를 돌았다. 소설에서 주인공인 도련님이 즐겨 이용하던 도고온천(道後溫泉)에 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엄마와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도고온천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으로 일본의 3대 고천(古泉) 중 하나라 했다.



마쓰야마의 길거리에서 만난 마사오카 시키의 동상. 어린 시절의 그는 야구를 즐겨했었다고 한다.


마쓰야마 여행을 앞두고 읽었던 몇 권의 책 중에는 이곳 출신 작가인 마사오카 시키
(正岡 子規/ Masaoka Shiki)의 작품도 권 있었다.



봄의 여신과/ 작별이 서글퍼라/
오는 봄날에/ 다시는 못 볼 테지/ 내가 없을 터인데

하얀 붓꽃이/ 뽀얗게 피어올라/
나의 눈에는/ 올해뿐인 봄날이/ 저 멀리 가려하네

병이 든 나를/ 달래어 주려는 듯/
활짝 피어난/ 모란 꽃송이 보니/ 절로 애달프구나

이 세상이란/ 변하는 줄 알지만/
내 사랑하는/ 황매화 나무 꽃이/ 다 떨어져 버렸네

멀어져 가는/ 봄날의 추억으로/
너울거리는/ 기다란 등꽃 송이/ 그림 그려 봤으면

달맞이꽃 시렁을/ 짜 올리려 하여도/
오는 가을을/ 기다리지 못하는/ 나의 목숨이런가

1901. 5. 4. 「묵즙일적」 '겨우 붓을 들고' 중




나쓰메 소세키와도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하이쿠'라는 말을 만든, 메이지 시대의 대표적인 문학가였다. 지병으로 인해 36세에 요절했다는 그가 말년에 병상에 누워 쓴 글에는 자신이 곧 이승을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에 담겨있었다.


소세키와 시키의 글을 통해 나는 마쓰야마라는 고장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유한한 생을 사는 우리에게
지금 바로 이 순간 나 자신을,
그리고 내 곁의 이들을
더 많이 사랑해 주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도 딱히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희망 같은 게 없었다. 그러나 기요 할머니가 된다, 된다 하는지라 역시 뭔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2019년 4월, 일본 에히메 마쓰야마-


◇ 여행팁 ◇

● 마쓰야마(松山)는 일본 시코쿠(四國) 지방 에히메현(愛媛県)의 현청소재지다. 한국 관광객 급감으로 인해 2020년 10월 현재 한국발 마쓰야마행 직항편은 운항하지 않으며 오사카 또는 도쿄를 경유해야만 갈 수 있게 되었다.

●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고온천(道後温泉)이 마쓰야마에 있는데 이 온천은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온천 건물의 모티프가 되었다. 우리에게는『나는 고양이로소이다』로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도 마쓰야마 근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 도고 온천을 종종 방문했었다고 한다.

● 마쓰야마가 낳은 대표적인 인물 중에는 메이지 시대의 시인이자 하이쿠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든 마사오카 시키(正岡 子規)가 있다. 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나쓰메 소세키와 마사오카 시키의 글을 읽고 마쓰야마를 여행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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