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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Jun 11. 2023

오랜만이야

두바이가 나에게 선물한 것은

토독 토도독.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소리가 내 얕은 잠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침대에서 일어난 난,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큼지막한 창문 너머로는 먹구름을 머리에 인 검푸른 보스포루스 해협이 펼쳐져 있다. 톡톡. 창문을 두드리는 조심스러운 손가락들을 연상시키는 소리. 그것은 금세 거침없는 몸짓으로 바뀌고 구름이 뱉어낸 물줄기는 세상을 향해 세차게 내던져지기 시작했다. 이스탄불에서 머무는 두 번째 밤의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빗소리가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짧은 일정으로 떠나온 여행에 비는 방해꾼에 가까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작은 물방울들이 만들어 내는 리듬이 결국엔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최근 몇 년 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머물렀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 기후를 정의하는 기준 중 하나는 바로 강수량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250mm 미만인 덥고 건조한 기후를 사막 기후라 부르는데 이 년 남짓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가 되어준 두바이가 대표적인 사막 기후 지역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100mm가량으로, 자연적으로 비가 내리는 날이 드문 이 도시는 구름씨를 뿌리거나 드론으로 전기자극을 주는 방법 등을 써서 인공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했다. 비가 흔한 것을 넘어 매년 여름이면 지겹도록 내리는 한국에서 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나에게 비라는 존재는 반가움보다는 귀찮은 마음과 동반해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두바이로의 이사가 결정되었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비에 젖어 질퍽거리는 길을 걷지 않아도 되고 비 내리는 아침에 들고나갔던 우산을 비가 그친 오후에 어딘가에 놓아두고는 빈손으로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기쁘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게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지겹고도 지겹던 비가 그리워질 줄이야.


이스탄불 여행을 앞두고 가방을 싸면서 울낭군은 나에게 우산도 챙겨 가자고 말했다. 산이라니. 그럼 이스탄불에서 그립던 빗소리를 다시 듣게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음의 대명사였던 단어가 불러오는 반가운 감정이 낯설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아 정말로 나는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을 나누는 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숙소 창가에 서서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다.

숙소의 창문 왼쪽으로는 유리문이 있고 그것을 열면 작은 의자 하나 넣으면 꽉 차는 자그마한 발코니가 있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전해오는 빗소리만으로는 아쉬운 마음에 나는 살그머니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어 보았다. 쏴아-하는 시원한 소리가 가슴팍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다. 가만히 손을 뻗어 보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6월 이스탄불의 빗방울.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 만나왔던 빗방울과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 없을 것이기에 와락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이스탄불을 여행하는 동안 비는 우리를 몇 차례나 찾아왔다.


내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온 마음으로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곁에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더니.


하지만 어디 비뿐이랴.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참으로 간사해서 무엇이든 내 곁에서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아직은 낯선 도시의 낯선 집, 그리고 낯선 침대에서 나의 남편과 아이가 잠들어 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서로 사랑하는 순간만큼이나 서로를 비난하게 되는 순간들도 많아지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난하고 미워하는 시간보다 사랑하고 감사하는 시간들이 더 많아질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고,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넸다. 한동안 내 곁에서 떠나 있었기에 더욱 반가운 비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곱게 쓰자고 생각하자마자 선물이 도착했다.

이 글을 쓰고 난 직후, 남편으로부터 장미꽃 한 송이를 선물 받았다. 간식을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가 나에게 주려고 사 왔다는 말에, 너무 고마워서 찔끔 눈물이 날 뻔했고 미처 떼지 못한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있는 것을 보고 늘 한결같은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그나저나 나, 참 좋은 사람이랑 결혼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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