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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Dec 01. 2023

짱구의 현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박타푸르


네팔은 전역이 문화유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처에 문화재를 보유한 나라다. 박물관에서나 만나볼 수 있을 법한 유물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데 가끔씩은 말 그대로 정말로 발에 채일 것처럼 소홀히 관리되고 있어 여행자에 불과한 내 주제에 걱정이 다 될 정도였다. 무려 10세기 초에 만들어졌다는 조각상을 보기 위해 좁고 복잡한 길을 돌고 돌아 찾아가 보니 그 조각상 위에 사람들이 빨래를 널어 말리고 있지를 않나, 어떤 역사 깊은 건물은 지금 당장 무너진대도 전혀 놀랍지 않아 보이는 아슬아슬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들이 그 위에 어제도 그랬고 내일도 그럴 것 같은 자세로 걸터앉아 있지를 않나. 이렇게 문화재와 사람이 모호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내가 이 나라에 와서 받은 가장 큰 문화충격 중 하나였다.


네팔의 거리 풍경


카트만두(Kathmandu), 파탄(Patan), 박타푸르(Bhaktapur)는 카트만두 계곡에 위치한 3대 고도(古都). 이 중 박타푸르는 개발이 유독 늦어져 가장 낙후된 곳이었다는데, 전화위복이라고, 그 덕에 아직까지도 중세의 분위기가 가장 짙게 남아 있어 이제는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 잡았다. 오늘 우리가 방문할 곳은 짱구나라얀(Changu Narayan)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곳으로, 박타푸르의 북쪽 언덕에 자리한 작은 산골마을이다. 대표적인 볼거리인 짱구나라얀 사원(Changu Narayan Temple)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며 리짜비 왕조 시대(4세기 ~ 9세기)의 조각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도 불린다 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박타푸르의 비현실적으로 허름한 숙소에서 전날 밤을 보낸 우리 일행은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짱구나라얀으로 향했다. 사원이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탓에 내 두 다리에 의지해서만 닿는 것은 무리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털털거리는 낡은 버스를 잡아 타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따라 언덕을 한동안 오른 후 또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야만 했다. 서두를 필요는 없는 날이었다. 하지만 길이 안 좋은 데다 경사까지 심한 터라 혹시라도 속도를 내려 해도 낼 수 없는 짱구나라얀 마을길을 우리는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박타푸르도 낡을 대로 낡은 도시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쇠락해 보이는 마을이었다. 그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다 보니 동네의 이모저모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를 태우고 힘겹게 언덕을 올라온 버스만큼, 아니 그보다 더 낡아 보이는 집들, 빼꼼히 열린 창문과 문 사이로 작은 얼굴들을 내밀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심 있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우리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에 무언가를 조각해 넣는 일에만 집중하는 이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박타푸르 지역은 예전부터 목공예로 유명한 곳이라더니 짱구나라얀도 예외는 아니어서 마을 주민 대부분이 농사와 더불어 목공예를 생업으로 삼고 있다 했다. 장인들이 정성스레 깎아 햇살 아래 늘어놓은 가면들의 표정과, 낯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난 여행자가 신기했는지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문득 고개를 들고 우리를 바라보는 닭이며 염소인지 양인지 모를 동물들까지 우리의 눈으로, 그리고 가슴으로 달려들어왔다.


짱구나라얀 마을 풍경


우리 일행을 이 작은 마을로 이끈 것도 짱구나라얀 사원이었다. 하지만 뒤돌아 보니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사원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우연히 방문했던 짱구 박물관이었다. 모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부 곳곳을 둘러보는 내내 나의 마음속에는 감탄이 떠나지 않았다. 이곳이 한 명의 개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언제나 그곳에 상주하고 계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찾아갔던 날만 그곳에 머물고 계셨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우리는 우연히 박물관 관장님을 만났고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세상에는 규모와 전시품의 양과 질로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박물관들이 참 많기도 많다. 그러나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녔다는 쌀알, 옛 동전, 그리고 나뭇잎으로 만든 우비나 세월의 옷을 입은 농기구처럼 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오던 일상적인 물건들을 모아 놓은, 어찌 보면 참으로 소박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전시품들을 정갈하게 진열해 놓고 그것들 사이를 누비며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가시는 박물관장님의 모습이 나에게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이런  다 어떻게 모으고 관리하셨어요?"


나의 질문에 대한 우문현답 같았던 의 대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반드시 이룰 수 있는 길이 있지요."


잠시 머물렀을 뿐이었던 여행자의 마음에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을 던진 짱구 박물관 관장님. 그에 대한 대답을 아직까지도 찾는 중이라는 사실이 부끄럽기는 하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그분만나게 된다면 그때 그 말씀 정말 감사했다는 인사를 꼭 드리고 싶다. 덕분에 아직도 지치지 않고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찾아가고 있으니.


2010년, 네팔 짱구나라얀


짱구나라얀 마을에서 내려다 본 주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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