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는 이탈리아 반도, 남으로는 튀니지와 리비아를 두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에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이 자리 잡고 있다. 시칠리아(Sicilia, Sicily)다.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까닭에 오래전부터 이 땅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잦았고 그 결과, 다양한 문화가 어우러져 이탈리아 본토와는 또 다른 시칠리아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 섬 출신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과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The Godfather)>의 배경으로 친숙하지만, 알고 보면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으로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다. 어쩌다 보니 이 지중해의 섬에 남편은 세 번, 나는 두 번이나 다녀오게 되었다. 그러고도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한번 같은 곳을 찾아갈 꿈을 꾸고 있는 걸 보면, 시칠리아는 분명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게 틀림없다.
오페라 데이 푸피, 시칠리아의 추억
이 섬을 추억할라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오페라 데이 푸피(Opera dei Pupi, Opera of the Puppets)다. 시칠리아 섬에서 전해져 오는 전통 인형극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페라 데이 푸피는 장인(匠人)이 인형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그것을 무대 위에서 조종해 연기까지 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오래된 것을 지켜나가는 일은 품은 많이 들지만 대우는 그다지 좋지 않다. 이런 이유로 오페라 데이 푸피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젊은이들도 줄어드는 추세라 했다. 시칠리아에 간 김에 우리는, 언제 사라질지 몰라 슬픈 이 인형극을 꼭 한번 보고 싶었다.
팔레르모의 거리에서
길거리 건물만 봐도 부유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이탈리아 북부에 비하면 남부 이탈리아, 특히 시칠리아는 경제적으로 낙후된 지역이다. 주도(州都)라고는 해도 쇠락한 분위기가 우세한 팔레르모(Palermo)의 거리를 헤매던 우리의 눈에 테아트로 데이 푸피(Teatro dei Pupi)라는 단어가 박힌 표지판이 들어왔다. 내가 비록 이탈리아어는 몰라도 테아트로는 극장이라는 의미일 테고 푸피는 인형이라는 뜻일 테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점점 더 좁아지는 길이 나타났고 그렇게 닿은 골목 귀퉁이에는 짐작대로 극장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허름한 건물에 달린건물만큼 낡은 문을 열고 들어서니 어두침침한 실내에 아저씨 한 분이 서 계셨다. 아쉽게도 그분의 성함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제페토 아저씨로 기억하기로 했다. 극장 여기저기에 걸린 목각인형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이 피노키오의 제페토 아저씨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가 이탈리아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아저씨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마저도 전혀 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우리가 어떤 언어로 이야기를 건네든 어차피 전달되는 정도는 비슷할 정도였다. 그러나 제페토 아저씨와 우리 부부는 만국 공용어인 손짓 발짓에 다양한 표정까지 동원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제와 다시 생각해 봐도 그것은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었다.
아저씨는 어차피 더 올 사람도 없다는 듯 아예 극장 문을 닫아걸더니 우리 부부를 작은 무대 근처로 이끌었다. 그리곤 처음 보는 작은 악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것을 연주하기 시작하셨다. 아! 저 먼 기억 속 추억을 퍼올리게 만드는 그것은 다름 아닌 오르골이었다. 연주를 마치고 이어 무대 반대편 또 다른 악기 앞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제페토 아저씨는 진지하고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악기 작동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말씀하시면 우리가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신 것인지 단어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발음하셨는데 놀라운 사실은 귀와 마음을 쫑긋 세우고 듣다 보니 정말로 아저씨가 건네는 이야기를 조금쯤은 알아듣겠더란 말씀!
제페토 아저씨의 작은 극장
아저씨의 아버지가, 그리고 이제는 아저씨가 직접 깎아 만들었다는 목각 인형들
저 문만 열고 나가면 따스한 시칠리아의 햇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어두침침한 데다 오래된 물건 특유의 냄새가 배어 나오는 작은 극장 안에서 문까지 걸어 잠근 채 제페토 아저씨가 들려주시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기대하지 못했던 모험에 신나면서도 왠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운영해 오던 작은 극장을 물려받았다는 아저씨. 그는 지금 자신이 연주해 보인 악기를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부터 연주해 왔다 했다. 아버지가 직접 나무를 깎아 인형을 만들고 그 인형에 옷을 해 입히고 그렇게 탄생한 공주와 왕자와 기사 마리오네트를 가지고 무대에 올라 연기를 펼치실 때 어린 자신은 무대 옆에서 지금 당신이 연주하는 바로 그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는 거였다.
극장 안에는 아저씨의 아버지가, 그리고 이제는 아저씨가 직접 디자인하고 나무를 깎고 얼굴을 그려 넣고 옷과 장신구를 해 입혔다는 인형들이 걸려 있었다. 우리가 이 인형극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아저씨는 이번에는 무대 뒤쪽에 숨어 있던 작은 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 문 뒤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저씨의 공방.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통나무 덩어리부터 눈에 점 하나만 찍으면 완성되는 기사 인형, 여기에 인형을 만들 때 쓰이는 게 분명한 각종 연장들까지 빈틈없이 들어찬 그곳은 제페토 아저씨의 비밀 공간인 것 같아 눈에만 담고 돌아 나왔다.
제페토 아저씨는 우리에게 인형을 움직이는 법을 알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덕분에 나와 남편은 아직 옷도 입지 못한 인형 하나를 번갈아들고는속성 교육을 받게 되었다. 아저씨의 손놀림을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직접 해보니 인형의 다리 한쪽을 움직이는 것조차 어찌나 어렵던지! 고군분투 끝에 한 걸음을 내디딘 나의 인형을 보고 제페토 아저씨도, 우리 부부도 환호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 인형극이 공연된다는 소리에 우리는 시간에 맞춰 다시 돌아오겠다 약속을 하고 극장을 나섰다. 오후 내내 팔레르모를 돌아다니면서도 나의 마음은 계속해서 아저씨와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는 극장으로 내달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약속한 대로 제페토 아저씨의 극장으로 되돌아갔던 그 저녁, 그곳에서 관람한 오페라 데이 푸피는 아마추어의 허술한 인형극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인형을 움직이는 이는 아저씨를 포함해 단 두 명. 그들은 손으로는 수십 개의 인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입으로는 마치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처럼 목소리까지 바꿔가며 등장인물의 대사를 읊었다.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에서는 발로 바닥을 쿵! 쿵! 쿵! 구르며 관객들까지 함께 흥분하게 만들었고 슬픈 장면에서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해 이탈리아어를 알지 못하는 나까지도 눈물을 흘리게 만들어버렸다. 놀랍게도 대사는 제페토 아저씨 혼자 다 맡아하셨는데, 거의 한 시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수많은 인형을 끊임없이 바꿔 들고 연기를 하는 동시에 효과음까지 내려면 고도의 기술은 물론 엄청난 집중력까지 필요할 것 같았다. 인형극이 끝난 후, 무대 아래로 내려오신 아저씨는 마치 방금 전 사우나에서 나온 사람처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제페토 아저씨에게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한 명 있다 했다. 그 아이가 전통을 잇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면서 쓸쓸해하시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부부는 다행히 오페라 데이 푸피를 볼 수 있었지만 이 전통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배우자가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다시금 시칠리아를 방문하게 된다면, 그때도 우리는 제페토 아저씨와 아저씨의 인형극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