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북부, 발트해와 맞닿은 지역에 그단스크(Gdańsk)라 불리는 항구 도시가 있다. 독일식 이름인 단치히(Danzig)라는 지명으로도 익숙한 곳이다. 폴란드의 도시를 굳이 독일식 지명으로까지 소개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단스크의 역사에는 얽힌 사연이 많다. 10세기에 건설되어 중세시대에는 이미 조선업과 무역항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이곳은 14세기 중반에 한자 동맹에 가입했고 동맹의 주요 무대였던 여타의 도시들이 그러했듯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는 폴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이기도 했을 정도로 번성했다고 하는데 18세기말에 이르러서는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20세기 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자유시(free city)가 된다. 참고로 자유시란, 그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 자체로의 국가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아 유럽은 다시 한번 전쟁의 화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에서 그단스크는 자유시로서의 지위를 잃고 나치 독일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파란만장한 도시의 역사는 이걸로 끝이 아니었다. 전쟁 말기 소련에게 점령당한 이 땅은 종전 후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장소가 바로 단치히, 오늘날의 그단스크다.
귄터 그라스(Günter Wilhelm Grass, 1927. 10. 16. ~ 2015. 4. 13.)는 독일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그단스크(당시, 단치히 자유시) 교외의 랑푸우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의 과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그 무렵 단치히에는 독일인과 폴란드인들이 섞여 살고 있었다. 그가 막 십 대에 들어설 무렵인 1939년에 이 도시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그 이후의 엎치락뒤치락했던 역사는 위에 간단히 언급했으니, 그의 초기 인생의 배경이 얼마나 불안정하고도 암울했을지는 누구라도 쉽게 상상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후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녹여내어 ‘단치히 3부작’이라 불리는 소설들을 발표했으며 그중에서 첫 번째 작품이 바로 『양철북』이다(나머지 작품들은 『고양이와 쥐』, 『개들의 시절』로 이중 전자는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어 있다).
소설은 주인공인 오스카 마체라트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만나게 되는 폴란드 시골마을의 감자밭에서 시작된다. 도망자였던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늘 껴입고 다니는 네 겹의 치마 속에 숨어 간신히 목숨을 구하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그들은 결혼을 한다. 그리고 곧이어 주인공의 어머니인 아그네스 콜야이체크를 낳는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가깝게 지내던 폴란드인 사촌, 얀 브론스키를 사랑했지만 근친혼이 허락되지 않았기에 독일인, 마체라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사촌과의 불륜은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스카가 태어난다.
성인의 그것 이상으로 비상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태어난 오스카는 자신의 아버지가 마체라트인지, 아니면 브론스키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모를 상황과 더불어 도무지 동조할 수 없는 세상 돌아가는 모습에 반기를 든 주인공은 세 살이 되던 해 스스로 계단에서 몸을 던져 신체적 성장을 멈춰버리고 만다. 우리 대부분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세상이 정해 놓은 퍼즐에 몸과 정신을 욱여넣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나라고 별 수 있나 싶은 마음에 싫지만 순응하는 부분이 생겨나고 그러다 보면 그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오스카는 스스로 어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어린이로 남기로 한다. 그렇게 키 94cm 모습에 머물게 된 그는 가여움과 사랑의 대상이 된다. 요컨대 그가 어떤 비틀린 생각을 하고 지울 수 없는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성장이 멈추어버린 가엾고도 귀여운 오스카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는 행운 아닌 행운을 거머쥐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렇게 면죄부를 얻은 그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격렬하게 양철북을 두들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겉으로는 소리쳐 우니까 푸르죽죽한 피부를 가진 갓난애로 보였겠지만 사실인즉 나는 식료품 가게 일체를 물려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 대신에 나의 세 번째 생일날에 어머니가 나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소망한 것에 대해 회의적으로 검토해 보기로 결심하고 있었다.
나의 장래와 관련된 이러한 모든 걱정 말고도,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마체라트가 나의 반대나 결심을 이해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존중해 줄 수도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카는 이해받지 못한 채 고독하게 전구 밑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60년이나 70년 후 모든 전원이 일시에 단전되어 전류가 끊길 때까지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리라고 추론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전구 아래에서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다만 나에게 약속된 저 양철북만이 당시 태아의 머리 위치로 되돌아가려는 나의 욕구가 강력하게 표출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이야기는 30세가 된 오스카가 정신병원에 갇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자신의 아버지 후보였던 얀 브론스키가 근무지였던 단치히의 우체국에서 얼떨결에 독일군에 맞서 싸우다가 처형을 당하고, 이어 또 다른 아버지 후보였던 마체라트가 나치당원이었던 과거를 숨기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오스카는 어린 시절 스스로 멈춰 세웠던 성장을 다시금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키는 조금 자랐으나 동시에 솟아난 등의 혹 때문에 기괴한 모습이 되고 만다.폴란드의 패배(얀 브론스키의 죽음)와 나치 독일의 몰락(마체라트의 죽음)을 뒤로하고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그것이 당도한 세계는 성장한 오스카의 모습처럼 기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양철북』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폴란드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역사에 대해 알고 읽는다면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등장인물이나 상황이 실제 역사의 주체들, 그리고 사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고 히틀러 청소년당에 가입하기도 했다던 귄터 그라스는 내부 고발자로서의 시선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저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요, 그러니 제 잘못은 없다니까요를 외치는 겉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끔찍한 죄를 쌓아온 오스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소위 비정상적인 모습이었던 그는 어쩌면 그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반영한 인물이 아닐까.
분량도 길고 배경도, 등장인물도, 그리고 묘사되는 사건까지도 그로테스크한 부분이 많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유쾌하지 않다는 핑계로도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는 진실들이 있다. 과정이 힘들겠지만 꼭 한 번은 읽어보기를 권한다. 덧붙이자면,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지만 나는 아직 그것까지 볼 엄두는 나지 않아 시도해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