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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Oct 26. 2020

코타키나발루 부럽지 않다

우리에게는 을왕리 해수욕장이 있다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아예 하지를 말아라.


여행이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반전이 있긴 하다.


아이에게 성인 공자가 할 법한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부모라고 하기엔 민망하게도 우리 부부도 약속을 어기는 일이 있다. 하지만 우리도 내 아이에게만은 모범적인 부모이고 싶다. 그러다 보니 여행이에게 옳은 일이라고 가르친 것을 우리부터 제대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는 부모가 정작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교육은 물거품이 되고 마니까.

몇 해 전 어느 일요일 오후 늦은 시각. 나와 울낭군은 그제야 막 낮잠에서 깨어난 여행이를 데리고 바닷가로 향했다. 다음 날은 월요일이고 새벽 여섯 시 사십 분이면 집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 날 아침 여행이와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아, 부모 되기 쉽지 않다.


여름의 물놀이만 한 게 있을까. 그날 아침 나와 울낭군은 여행이와 약속을 했다. 오늘은 물놀이를 하러 바다에 다녀오자고. 이것이 바로 일요일 저녁 식사 시간이 다 된 시각에 우리 가족이 바다행 자동차에 몸을 실은 사연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너무 멀리까지 가는 건 무리일 터라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해변이라는 인천의 을왕리 해수욕장을 목적지로 했다. 을왕리 해수욕장은 인천국제공항에서는 차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다. 제1 여객터미널에서는 20분.





과연 여름은 여름이었다.


저녁 6시 넘어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바닷물은 낮의 그것처럼 따뜻하고 사위도 아직 환하다. 해가 지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바다에 뛰어들었으면 했지만 아차차, 여기는 서해였지!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은 해변에는 드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고 여행이는 그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군데군데 생겨난 물 덩이에서 헤엄치는 모래빛 작은 물고기들이며 진흙 속에서 대롱 같은 것을 길게 빼놓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조개들을 살피며 여행이는 얼마나 신이 났던가.

여행이의 수영복이며 타월, 갈아입을 옷까지 다 챙겨갔지만 우리 둘 중 적어도 한 명은 그 바다에 함께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우리 부부. 결국 울낭군이 치명적인 각선미까지 드러내고 온 몸을 던져 물속에서 여행이와 놀아준 덕분에 나는 해변에서 남편과 아들 구경도 신나게 하고 코타키나발루 뺨치도록 아름다운 을왕리 해수욕장의 해넘이 구경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코타키나발루 아닙니다. 산토리니도 피지도 아니고요. 인천 을왕리입니다.


세계 3대 선셋 명소로 꼽히는 곳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그리스 산토리니, 그리고 피지란다. 나는 피지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그 유명하다는 선셋을 즐겨봤다. 그리고 단언컨대,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만난 선셋은 코타키나발루며 산토리니의 해 질 녘 풍경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바다 너머로 사라지는 해를 배경으로 바닷물 속에서 점프를 하고 게 앞발처럼 손을 양 옆으로 들고 씰룩거리며 집게 춤을 추고 한 명이 바다에 빠지는 시늉을 하면 다른 한 명은 마치 구조대처럼 날쌔고도 늠름하게 상대방을 구조하는 우리 집 두 남자를 바라보는 내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미소 짓게 한 울낭군에게 있어 을왕리 해수욕장에서의 매분 매초는 그야말로 체험 삶의 현장이었단다. 나중에 아주 나아아아중에 드디어 해가 수평선과 맞닿을 즈음 드디어 물 밖으로 나온 울낭군 왈.


"이제야 풍경이 보이네."




손가락, 발가락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바다에서 신나게 논 여행이가 다시 갯벌에 앉아 놀기 시작했다. 밥 먹으러 가야 하는데....벌써 저녁 여덟 시도 넘었는데 아이는 도무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래도 매일 이렇게 갯벌에 앉아 놀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놀고 싶은 만큼 충분히 놀게 해 주었다.

을왕리 해수욕장 바로 옆에는 수돗가가 있어 그곳에서 아이를 대충이나마 씻길 수 있었다. 그 사이 하늘색은 더더욱 오묘해지고 그 빛에 반한 여행이는 아빠 품에 안겨 하염없이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을왕리 해수욕장에서의 오후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몇몇 사람들이 아이들을 씻기고 수돗가에 기저귀 같은 것을 그냥 버리고 가서 불편하고 화가 났던 것만 빼곤 말이다. 실내 공간에 비해 실외 공간에서는 쓰레기통을 찾는 것이 쉽지 않으니 자신들이 만든 쓰레기는 되가져 갈 수 있도록 가방이나 봉투 하나 정도 챙겨간다면 다 함께 쾌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올해는 바닷가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놀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추억 속 사진을 꺼내보았다. 지난한 올해의 여름을 보내며 부디 내년 여름은 해변에서 불태울 수 있기를 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꿈은 이루어진다고 내년부터 몇 년간 정말로 바닷가에서 살게 되었다. 2021년 우리의 여름은 어떨 것인가. 코타키나발루 뺨 때리던 을왕리 해수욕장에서의 추억을 곱씹는 것도 좋지만 내년엔 제발 해변에서의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게 되길 비나이다 비나이다.


-2018년 7월, 인천-


◇ 여행팁 ◇

● 을왕리 해수욕장
서울에서 자동차로 약 한 시간, 인천국제공항에서도 약 15분 떨어진 위치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환상적인 낙조로 유명하다.
주소: 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동 746(을왕리 해수욕장)
주차: 을왕리 공영주차장(인천광역시 중구 을왕동 714) 이용 시 30분당 주차비 400원이라는 상당히 저렴한 금액에 주차 가능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을왕리 해수욕장과 더 가까운 사설 주차장은 주차가 조금 더 수월하지만 주차비는 공영주차장에 비해 비싼 편.
웹페이지: http://rwangni-bea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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