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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Nov 03. 2020

나의 할머니에게

할머니, 할머니 맞죠?


미 동부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델라웨어주(Delaware)는 남쪽과 서쪽으로는 메릴랜드주, 북쪽으로는 펜실베니아주와 맞닿아 있다. 메릴랜드주펜실베니아주만 하더라도 그곳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함께 떠오르는 지명이나 인물, 또는 학교가 있는데 그 사이에 낀 델라웨어주는 어쩐 일인지 딱히 연상되는 것 하나 없는, 그야말로 존재감이 희미한 곳이었다.



그랬던 곳이 이젠 가끔씩 생각나는
그리운 곳이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보금자리에 짐을 풀고 이런저런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던 우리 부부는 숨 돌릴 여유가 생기자마자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아주 멀리까지는 못 가더라도 차를 몰고 서 너 시간은 신나게 달리고 싶었다. 기왕이면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엘 가보고도 싶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지도를 살펴보다 우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고서야 굳이 떠올릴 일 없던 델라웨어주를 목적지로 택했다.


나와 울낭군은 델라웨어주의 주도인 도버(Dover)와 최대의 공업도시인 윌밍턴(Wilmington), 그리고 델라웨어 만 너머로 뉴저지주가 바라다보이는 바워스 비치(Bowers beach)를 종횡무진 옮겨 다니며 이 새로운 지역을 탐험했다. 그러다가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오자 식사할 곳을 정해야 했는데 델라웨어에서의 첫 식사인만큼 좋은 곳에서 맛있는 요리가 먹고 싶어 이 주에서 가장 큰 도시라는 윌밍턴으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가장 좋다는 호텔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호텔 듀폰 윌밍턴(Hotel Du Pont Wilmington)은 무려 1913년에 문을 연 역사 깊은 호텔이었다.


12층짜리, 호텔이 오픈했을 당시를 생각하면 상당한 규모로 지어진 건물은 내외부 인테리어가 상당히 고풍스러우면서도 우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Historic Hotels Worldwide®의 멤버란다. 그런 곳에 자리한 그린룸(Green Room)은 요식업 관련 무슨무슨 상을 여러 차례나 수상한 유명한 레스토랑이라 했다. 그래서 큰 기대를 했건만 분위기나 서비스가 뛰어난 데 비해 메인 요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워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 할머니가 나타났다.


나보다도 키가 작은 귀여운 할머니가 언뜻 봐도 매우 정성스레 마치 소녀 같은 모습으로 차려 입고는, 디저트를 고르고 있던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믿을 수 없게도 곧 아흔을 바라본다노년의 숙녀는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는지 하나같이 멋지게 차려입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즐기는 중이었다. 할머니는 66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결혼식을 올리셨다 했다. 호기심 많은 그분의 질문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잠시간 이어졌고 그럼 맛있게 드시라, 잘 먹고 가라, 그렇게 우린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두고두고 떠오르는 순간은 할머니도 나도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떠나던 순간 찾아왔다. 호텔 입구에서 할머니를 만나 다시 한번 인사를 드리니 너무나도 반가운 기색으로 손바닥으로는 내 볼을 쓰다듬고 눈으로는 내 눈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주 예쁘네. 신랑도 아주 잘생겼고."라고.


"앞으로의 인생,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라고도.


순간, 마치 내가 이 할머니를 아주 오랫동안 알아온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한국에 계신 나의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똑같은 말씀을 하시던 순간이 겹쳐지면서 눈물이 후드득 쏟아질 것만 같았다.


부모님이 모두 직장을 다니셨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한 집에 살던 우리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밤이면 나도 동생도 할머니 옆에 누워야만 잠을 잘 수 있었는데 부모님이 난생처음 침대를 사주셨던 날에도 처음엔 기쁨에 겨워 침대 위에서 누웠다 앉았다 했지만 잠잘 때가 되자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할머니 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누웠다. 우리 자매가 누울 자리까지 미리 펴두고 계셨던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불을 끄고 어서 자라고 하셨다.

불을 끄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엄습하지만 이내 눈은 어둠에 적응해 주변의 익숙한 사물들부터 찾아내곤 했다. 나는 옆에 누운 할머니의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할머니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 움직임이 계속되는 한 나의 할머니는 살아계신 것이었다. 할머니가 너무 좋아 그런 우리 할머니가 돌아가신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할머니의 가슴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 편히 잠들곤 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할머니가 나와 울낭군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었다. ''재미있게 살아. 싸우지 말고.''라고.


우리 가족이 델라웨어주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장례를 다 치르고 난 뒤의 일이었다. 소식을 듣고도 어차피 당장 한국으로 향하기는 힘들 텐데 괜히 마음만 아파할까봐 염려하는 마음에 가족들이 나에게는 장례식을 다 마무리하고 연락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고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나는 마지막 인사도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에 얼마나 울었나 모른다. 연락을 받았다면 갈 수 있었는데. 꼭 갔을 텐데. 울음이 멈췄다가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찾아뵈었던 할머니가 나와 울낭군의 손을 꼭 잡고는 싸우지 말고 잘 살라고 말씀하셨던 게 자꾸만 떠올라 계속 울음보가 터지곤 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나의 할머니가 잠시
델라웨어주의 소녀 같은 할머니로 변신해
먼 타국 땅에 있는 나와 울낭군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왔다
가셨던 건 아닐까라는.


할머니, 그러셨던 거 맞지요?


-2013년 8월, 미국 델라웨어 윌밍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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