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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Nov 25. 2021

최강 요괴왕

꿈은 잃지 않는 거야. 어떤 상황에서라도.

일본인들은 유독, 산 자들의 세계와 살아있지 않은 존재들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일본 작가들의 책이나 일본인이 만든 영화에는 죽은 이들의 영혼이나 요괴 같은 비현실적인 존재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게다가 호러 영화가 아니고서야 대체로 그들은 무섭기보다는 선량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미타니 코키 감독의 영화, <멋진 악몽, ステキな金縛り>에는 퇴출 직전의 변호사인 에미와 421년 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무사, 로쿠베가 등장한다. 변호사로 먹고살기 위한 마지막 기회를 잡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던 에미. 급기야 그녀는 유령인 로쿠베를 증인석에 앉혀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그런데 잠깐, 이 영화, 참으로 신기하다. 죽은 이들이 시퍼러둥둥 하니 부패한 얼굴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지만 다 보고 나면 섬찟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 찾아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도 한때는 희로애락을 느껴가며 살아 숨 쉬던 존재들이었기에 지금 이 순간, 펄펄 뛰는 심장을 지닌 채 살아있는 우리들과 정을 주고받는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 것이다.


몇 해 전 어느 날, 여행이에게 책 한 권을 사줬다. 어린이집에서 나름의 사회생활을 하던 여행이가 친구로부터 정보를 얻었는지 어쨌는지『최강 요괴왕』이라는 책을 꼭 사달라는 거였다. 흔쾌히 지갑을 열기 힘든 제목이었지만 또박또박  이름대며 그것이 꼭 갖고 싶다길래 내키진 않았지만 그것을 구매하고 그럼 재미있게 읽으라 말해 주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책이라고 딱 선을 그었건만 자다가 꿈에 나올 것 같은 비주얼을 한 요괴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그 책을 왜 굳이 나랑만 읽고 싶다는 건지. 여행아, 엄마 말 잘 들어봐. 아빠도 글자 읽을 수 있어. 여하튼 이런 이유로 당시의 나는, 꿈자리가 사나울 지경으로 날이면 날마다 일본 각지에 살고 있다는 요괴들에 대한 설명이 가득한 책을 읽다 잠이 들곤 했는데 몰래 버리고 오고 싶었던 그것을 실수였는지 어쨌는지 두바이로 보내는 이삿짐에 싣고 말았다. 그러나『최강 요괴왕』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종종 되새기게 되는 추억이 있으니 이제는 이 책이 마냥 미운 것만은 아니라 하겠다.


일본 주고쿠 지방, 돗토리현 북서부에 자리한 작은 항구도시, 사카이 미나토(境港)에는 요괴 거리가 있다. 이 거리의 정식 이름은 미즈키 시게루 로드(Mizuki Shigeru Road)로 일본 요괴 만화의 대부로 불리는 미즈키 시게루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곳이란다. 사카이 미나토 역에서부터 미즈키 시게루 박물관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무려 백칠십 개가 넘는 청동 요괴 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소년 시절부터 요괴에 푹 빠져 결국엔 요괴 만화계의 권위자가 된 작가가 탄생시킨 각양각색의 요괴들이다. 이 동상들은 누구나 무료로 감상하고 만져볼 수 있는데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들을 만나기 위해 이 도시를 찾은 수많은 이들의 손길이 닿아 동상들은 이미 반질반질해질 대로 반질해진 상태였다. 길에는 요괴를 테마로 한 가게들이며 요괴 캐릭터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그쳤다를 하는 날이었지만 우리 가족은 그 길을 천천히 걸으며 동상들과 가게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사카이 미나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미즈키 시게루는 한국어로도 출간된  게게게의 기타로(ゲゲゲの鬼太郎)농농 할멈과 나(のんのんばあとオレ)를 비롯한 많은 히트작을 남긴 유명한 작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20대 초반 어린 나이에 한쪽 팔을 잃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꿈꾸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남아 있는 한 팔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한다.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전쟁의 참상을 글과 그림으로 옮겨 내기도 했는데 종군위안부에 대한 만화를 그려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기도 했다고.


미즈키 시게루라는 인물이나 그가 탄생시킨 요괴들을 향한 팬심에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요괴에 큰 흥미가 없다 하더라도 돗토리현을 여행한다면 하루쯤 시간을 내어 사카이 미나토의 요괴 거리를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한다. 으스스하게 꾸몄지만 어두운 느낌은 들지 않는 그곳에서 장난꾸러기처럼 생긴 요괴들과 기념사진을 찍어봐도 좋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쪽 팔을 잃었지만 남은 한쪽 팔만 가지고서도 어릴 적부터 간직해온 관심사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한 남자의 인생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는 데 여행이의 오랜 벗, 최강 요괴왕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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