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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Nov 04. 2021

그런 계절

올해도 함께 양초를 만드셨을지 궁금해지는 계절이 되었다

달력을 보니 11월이라는 글자가 눈에 담겨온다. 다음 순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곳엔 여전히 여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지내고 있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는 마음만 먹으면 일 년 내내 바다에서 수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온이 온화한, 아니지, 여름에는 문자 그대로 절절 끓고 겨울에도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는 곳이다. 지금까지의 인생 대부분을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들에서 지내왔기 때문일까. 내 머릿속의 계절과 실제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사이의 괴리감이 아직까지도 나에겐 낯설기만 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문을 열고 집을 나서면 더운 바람이 훅 하고 달려들겠지. 하지만 나는 내 마음속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 때면 늘 같은 곳을 떠올리곤 한다.


브로묄라(Bromölla)는 스웨덴 남부 스코네(Skåne) 지방에 위치한, 인구 7,500 남짓되는 작은 도시다. 지난 2003년 겨울, 브로묄라 방문을 앞두고 그곳의 정보를 찾아보았을 때는 분명히 인구가 8,000명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였었는데 2010년의 인구통계를 보니 그새 몇백 명이 더 줄어 7,595명이 살고 있다고 나와있다. 그로부터 십 년이 더 흐른 오늘, 브로묄라에 사는 사람들은 더 줄어들어 있겠지. 안 그래도 대도시를 제외하면 사람 만나기 어려운 스웨덴에서도 시골의 작디작은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조용한 브로묄라가, 아마도 지금은 더 조용해졌을 그 동네가, 나는 왜 겨울만 되면 그리워지는 걸까.


스웨덴의 겨울은 유난히 춥고도 길다. 유럽 북부,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자리한 이 나라의 국토는 북에서 남으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북쪽으로 올라가면 하루 종일 해가 떠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할 만큼 일조시간이 지극히 짧다. 그리고 이는, 스웨덴 최남단으로 내려가도 별 차이가 없다. 자연이 안 도와주면 인간이 나설 수밖에. 그래서 스웨덴인들은 해의 도움 없이도 춥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해 인공의 빛인 촛불을 이용하기로 했다. 유난히도 추위를 많이 타는 내가, 겨울만 되면 스웨덴 앓이, 브로묄라 앓이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브로묄라에서 만났던 촛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조만간 고향집에 다녀올 예정인데 시간이 되면 함께 다녀오자고 말했다. 가자는데 따라가지 않을 이유는 없어 며칠 후 우리 둘은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했다. 스웨덴의 여느 시골처럼 브로묄라도 인적이 드문, 몹시 조용한 마을이었다. 기차에서 내린 건 분명 낮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벌써 늦은 저녁의 그것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그래도 남쪽이라는 이유로 햇살이 조금이나마 더 길게 지상에 머물러 주었기에 기쁘고 반가웠던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하던 날 친구의 어머니는 "오늘 저녁에 양초를 만들 거란다."라고 말씀하셨다.

"초를 만든다고요? 집에서요?"


겨울이 되면 스웨덴의 상점들은 양초들로 넘쳐난다. 그곳에서 팔려나간 각양각색의 양초들은 이번에는 누군가의 집으로 옮겨가 집안 제일 좋은 자리를 잡고는 불 밝힌 자태를 뽐내곤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창마다 놓여 있는 양초들이 낮에는 하얗게 밤에는 불그레한 빛을 더한 채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따스하게 느껴지던지. 그래서 나는, 겨울의 스웨덴이 사람 반, 양초 반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상점에만 가면 한가득 내놓고 파는 그 흔한 양초를 집에서 만든다고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양초를 만드는 것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오랜 전통이라 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양초들이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 양초는 직접 만들어 쓰는 물건이었단다. 집에서 만들어지는 양초는 심플하면서도 동시에 우아함이 느껴지는 디자인, 자연스러운 흰 색상, 그리고 핸드메이드를 특징으로 하는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르는 소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의 특징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많다.


친구의 어머니는 낮부터 지하 창고와 부엌을 오가며 준비를 하느라 몹시 바쁘신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준비물은 파라핀을 끓인 물이었는데, 어머니는 몇 시간 동안이나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파라핀을 끓이시더니 오후 늦게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셨다.

"이제 시작이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보자."

친구의 어머니가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따라 나와 내 친구, 그리고 친구 어머니의 동네 친구 두 분이 결전의 장소로 향했다. 창고는 꽤 넓었다. 그 공간 한가운데에는 파라핀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커다란 양동이가 놓여 있었고 양동이엔 온도계가 달려있었다. 아주머니들은 좋은 초를 만들기 위해서는 파라핀 물 온도를 적당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시며 계속해서 번갈아 가며 온도계를 살펴보시곤 했다. 양동이에서 적당히 떨어진 둘레에는 나무로 짠 판이 한 쌍씩 놓여 있고 그 판 사이에는 얇은 막대 수십 개가 걸쳐져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막대에는 끝부분이 묶여 있는 두꺼운 흰색 실이 세 줄씩 매어져 있었다. 나무판도 막대기도 흰색 실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그 창고에 있던 우리 모두는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를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이 감돌았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실이 달린 얇은 막대를 들어 올리더니 실 부분을 부글부글 끓는 파라핀액 속에 잠시 넣었다 뺐다. 그것은 원래 자리에 다시 걸쳐 두고 이번엔 그 옆의 막대를 가져와 마찬가지로 파라핀액에 넣었다 뺐다. 두 번째 막대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 나면 다음엔 그 옆의 막대, 또 그 옆의 막대를 가져와 동일한 동작을 반복한다. 파라핀액 속에 실을 담그는 시간은 너무 길게도 너무 짧게도 안된다 하셨다. 그러니까 소금 적당량, 고춧가루 적당량처럼 '적당한' 시간만 넣었다 빼야 하는데 처음에는 도대체 뭐가 적당한 것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지만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 손에 익어 '이것이 단순 노동즐거움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담그고 빼고 걸치고 또다시 담그고 빼고 걸치고, 마치 로봇처럼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를 서 너 시간. 파라핀액에 몇 번이고 들어갔다 나온 후까지도 여전히 얇기만 하던 실들이 맛있는 음식을 냠냠 먹고 오동통 해지는 아이들처럼 동글동글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만들고 있는 양초가 굵어지면 굵어질수록 파라핀액에 그걸 담갔다 빼는 내 팔은 아파왔지만 양초들과 함께 마치 내 살도 따라 오르는 것처럼 가슴만은 점점 더 뿌듯해졌다. 그렇게 무려 다섯 시간이 흐른 후 그해의 양초 만들기는 끝이 났다. 팔이고 어깨고 안 아픈 곳이 없었고 독한 파라핀 냄새를 몇 시간 내리 맡은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도 했지만 대롱대롱 매달린 뽀얗고 통통한 양초들을 보니 마음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아주머니들은 오랜 친구 사이로,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아온 오랜 세월 동안 매년 겨울이면 함께 양초를 만들어 오셨다 했다. 만든 것을 내다 팔아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집에서 모여 함께 양초를 만들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그렇게 정성을 쏟아 직접 만든 양초로 집안을 따뜻하게 꾸미는 것, 그것을 목적으로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양초를 함께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전통 방식 그대로 양초를 만드는 것은 재료 준비부터 마지막 치우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에 이제는 상점에서 파는 양초를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라지만 아주머니들은 앞으로도 계속 함께 양초를 만들 것이라 하셨다. 오랜 시간 힘을 합쳐 양초를 만든 후 식탁에 둘러앉아 먹는 간식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이게 어떻게 양초가 될까 싶었던 것들이
진짜로 양초가 되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올해도 함께 양초를 만드셨을지 궁금해지는 계절이 되었다. 일 년 내내 여름처럼 느껴지는 두바이도 11월로 접어 드니 이제는 바깥을 걸어 다닐 수는 있을 만큼 기온이 누그러졌다. 중동 지역에서 맞이하는 첫 번째 연말은 과연 어떠할까. 흰 눈이 내리고 칼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겨울이 오면 늘 따뜻한 나라로 여행 갈 것을 꿈꾸곤 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 따뜻한 나라에 살고 있으니 '정말 겨울다운 겨울'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된다.


올 겨울엔 눈이 내리는 나라에 잠시라도 다녀오고 싶다.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꺼운 스웨터와 겨울 패딩을 꺼내 입고 열 달 째 신발장 가장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톰한 부츠를 꺼내 신고선 뽀드득 소리를 내며 눈길을 걷고도 싶다. 그러다가 커다란 창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가로등만으로는 충분히 밝힐 수 없을 만큼 어두워진 거리를 밝히는 양초의 따스한 불빛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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