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가족 Oct 18. 2021

Permission to Dance

대한민국 세종 <국립세종도서관>

초등학교 때 김민종, 중학교 때 곽부성, 고등학교 때 젝스키스. 아, 연식 나오네. 여하튼 오래전 이 오빠들의 광팬이었을 시절, 팬심에 쏟을 평생의 힘을 다 써버렸는지 그 이후론 연예인을 좋아해 본 적이 없다. 몇 년 전부터 K-Pop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BTS, 그러니까 방탄소년단이 등장했을 때도 예외란 없었다. 방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거라곤 방탄 커피밖에 몰랐던 나는 그 유명짜한 그룹이 누구인지 검색해 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요즘 그들의 음악에 빠져있다.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의 노래 중 한 곡에 푹 빠져버려 눈물까지 줄줄 흘리며 그것을 듣고 있다. 아, 내 인생에서 덕질은 젝키시절로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팬심 총량의 법칙은 깨져버리고 마는가.


Permission to Dance.


제목을 듣자마자 눈물이 핑 돌았다. 허락(permission)과 춤(dance)이라니. 얼핏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내포한 거리감과 그 거리를 좁혀나가는 용기와 당당함이 제목에서부터 느껴졌던 것 같다. 가사가 하필이면 영어로 되어 있어 나는 노래가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찾아 읽어 봐야 했는데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는 진짜로 봇물이 터져버렸다.

뮤직비디오를 본 것은 노래를 들은 지 한참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도 결코 만만치 않아 마스크를 쓰고 있던 등장인물들이 답답한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신나게, 그 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마음껏 춤을 추는 장면에서는 오열이나 안 하면 다행일 정도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사연 있는 사람처럼 음악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방탄소년단의 명곡을 즐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고 이 연사, 힘주어,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런데 즐기는 게 확실하다면서 나는 왜 자꾸만 눈물을 흘리는 걸까.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작년 초, 전 세계가 듣도 보도 못한 바이러스로 인해 옴짝달싹 하지 못하기 시작하던 때로 되돌아 달려간다. 술 이름이랑 발음이 같아 처음엔 희극적으로까지 느껴지던 그 바이러스가 등장했을 때 아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이고 우리의 삶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칠지 몰랐다. 여행이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집 저녁상 위 콩자반처럼 생긴 그 불청객이 우리 곁에 이렇게나 오래 머무를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없었다.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나는 점점 더 무서워졌다. 뉴스를 켤 때마다, 문자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점점 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마치 천천히 물이 차오르는 우물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여기에 계속 있다가는 물에 빠져 죽거나 혹은 그러기 전에 두려움에 함몰되어 죽을 것만 같은 느낌.


내 집 현관문을 나서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던 그 시절에 우리는 서울에서 세종으로 이사를 했다. 울 낭군이 그 도시에서 1년 간 근무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결혼 이후 워낙 이사를 자주 다닌 때문에, 아니 덕분에, 살던 집을 정리하고 새 집을 구하고 이삿짐을 옮기는 일 자체에 대한 거부감도 두려움도 없었다. 하지만 시기가 시기인만큼 안 할 수만 있다면 이사를 안 하고 싶었다. 그러나 머리를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봐도 이사를 피할 방법은 없어 찬바람 몰아치는 2020년 어느 날, 우리 가족은 남쪽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감염에 대한 불안에 더해 복직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금 휴직서를 내야  스스로의 처지 때문에 마음이 곱절로 착잡했다.


그러나 청승을 떨 여유 따윈 없었. 그래서 나는 내 앞에 놓인 상황의 장점에만 집중하려 애를 썼다. 서울에 비하면 다소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곳이었지만 다행히 세종의 많은 부분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신도시라 그런지 건물도 길도 깨끗해서 좋았다. 도시 한가운데서 크고 작은 규모의 공원과 물길 등을 만날 수 있는 데다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말 그대로 자연의 한가운데로 퐁당 빠져버릴 수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서울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야생 지대와도 같은 올림픽대로를 달리는 것은 몹시 피곤한 일이었는데 세종에서는 울 낭군의 직장도 여행이가 다닐 어린이집도 집에서 쉽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사실 또한 감사할만한 일이었다. 그랬다. 감사해 마땅한 일들은 많았고 나로 하여금 그런 마음이 우러나게 해주는 모든 것이 문만 열고 나가면 되는 곳에 펼쳐져 있었다. 그 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였지만.


당시의 나는 많은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낯선 도시, 낯선 집, 그리고 환영받기 힘든 시기에 불쑥 나타난 외지인이라는 스스로의 존재까지 모두 다. 낙천성을 최대의 무기로 삼아 살아온 내가 우울한 마음에 휩싸여 매일을 힘겹게 견뎌낸 시기가 딱 두 번 있었다. 그 두 번째 시기가 바로 2020년 초였을 만큼 그때의 나는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세종 이주 초기 한동안은 특히나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큰 시기여서 여행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내가 집에서 종일 데리고 있었다. 울 낭군이 회사에 나가 있는 동안의 하루는 길었다. 많은 부분이 손에 익지 않은 집에서 삼시 세 끼를 만들어 먹고 먹이고 에너지가 펄펄 끓는 어린아이와 아무 말 않고 서로 마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하루 종일 나의 울적한 기분을 숨기고 아이를 즐겁게 해 줄 만한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생각해 낸다는 , 그것 나에겐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도 , 우리를 둘러싼 황이 이해되지 않고 답답했을 어린 여행이를 집 안에서나마 걱정 없이 즐겁게 지내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는 생각이 매일 나를 따라다녔다.


울 낭군나에게 하루에  분씩이라도 집 앞 놀이터에 나가 앉아 있으라고 했다. 너무 집 안에만 갇혀 있으니 기분이 더 울적해지는 것이라고, 밖에 나가 햇살이라도 쬐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 걱정 어린 조언을 듣고도 나는 한참을 망설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러다가 큰일 나겠다 싶었던 어느 날, 가슴속 용기를 쥐어 짜내 집 앞 놀이터로 나갔다. 아직 바람이 매서운 시기여서 그곳엔 나와 여행이 둘 뿐이었다. 거실 창문으로 바라만 보던 미끄럼틀을 처음으로  여행이는 다람쥐처럼 쉴 새 없이 그것을 오르내렸고 나는 근처에 서서 여행이의 기쁨으로 터질듯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저 햇살 아래에서 내 아이의 빛나는 얼굴을 바라본 것뿐이었는데 놀랍게도 가슴이 뻥 뚫리는  같았다. 그날 이후, 여전히 손에는 소독젤과 소독용 티슈를 굳게 쥔 상태였지만 집 앞 놀이터에 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의 크기는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우리는  함께 세종의 핫플레이스, 세종호수공원에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산책길, 내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것이 바로 국립세종도서관이었다. 호숫가에 자리한 도서관에는 이 도시로 이사 오기 전에도 다녀와 본 적이 있었지만 팬데믹이 터진 이후론 아직 발걸음을 하지 못하던 참이었다. 겨울바람에 잔잔하게 출렁이는 호수, 그 건너로 바라다 보이는 도서관은 나에게 괜찮으니 어서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세종호수공원에서 바라본 국립세종도서관. 건물이 배처럼도, 펼쳐 놓은 책처럼도 생겼다.


그렇게 시작된 국립세종도서관 나들이는 우리 가족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때가 때인지라 우리는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게슈타포처럼 사람들을 관찰하는 열감지기를 거쳐 입장해야 했고 마스크를 안 쓰고 있는 모습이 두 번 발각되면 도서관에서 쫓겨나게 된다는, 그다지 친근하지 않은 안내문과 마주해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급적 사람이 드문 구석을 찾아가 앉아 KF94 마스크 안에서 숨을 몰아쉬며 책을 읽는다 해도 지금 같은 시기에도 내가 사랑하는 책들로 가득한 공간에 여전히 드나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없는 행복이 되어주었다.



국립세종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이 운영하는 3개의 분관 중 하나이자 서울을 벗어난 지역에 세워진 첫 번째 분관으로 2013년에 개관했다. 역사는 길지 않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서관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그런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세종을 대표하는 도서관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진 곳이다. 행정수도로 출발한 세종시의 특징은 국립세종도서관이 보유한 자료에도 잘 반영되어 있어 타 도서관과는 달리 정부 각 부처 공직자들과 공공기관 근무자,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정책자료의 비중이 상당히 크지만 일반인 이용객도 적지 않아 여느 도서관과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의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작은 국립 어린이도서관이라 불러도 민망하지 않을 수준의 어린이 전용 공간까지 마련되어 있기에 여행이와 함께 가기에도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아쉽게도 우리가 도서관 방문의 기쁨을 느끼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립세종도서관은 팬데믹으로 인해 임시휴관을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팬데믹 초기의 갑작스러운 이사와 휴직과 자발적인 자가격리로 인한 불안증은 도서관과 호수공원을 드나들며 바깥바람을 쐬는 과정에서 어느덧 자연스레 치유가 되었으니. 임시휴관 기간은 거듭 연장되었지만 그동안에도 나는 원하는 과목 수강신청을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선착순 방문대출 예약에 성공해 책을 빌리거나 반납하기 위해 국립세종도서관을 드나들었고 도서관 웹페이지를 통해 오디오북이며 전자책, 전자잡지 등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같은 시기를 지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불안감과 우울감을 겪었으리라 믿는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사실은 이렇게도 힘없고 별 수 없는 존재였구나 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고 그 어떤 시선에서도, 그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쩌면 의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We don't need permission to dance.



INFORMATION

국립세종도서관

주소: 세종특별자치시 다솜3로 48

전화번호: 044-900-9114

웹페이지: http://sejong.nl.go.kr/



작가의 이전글 도서관이야? 미술관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