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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가족 Sep 15. 2021

도서관이야? 미술관이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

아라비아 반도 동부, 페르시아만과 접한 지역에 영국의 보호 아래 있던 토후국들이 있었다. 영국 통치하에 지배자로 군림하던 세습 전제 군주를 토후라 부르는데 이 지역은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유목민들의 세계였을 것이다. 그중 일곱 곳이 지난 1971년 12월 2일, 아랍에미리트연방(United Arab Emirates)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한다. 이후, 국토 대부분이 황량한 사막이었던 아랍에미리트는 불과 반백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발전을 이룩해낸다. 그 바탕에는 아부다비의 석유가 가장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중동의 뉴욕이라 불리는 두바이도 큰 힘을 보탰을 것이다.


두바이(دبي‎, Dubai)는 아랍어로 '메뚜기'라는 의미라 했다. 마치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메뚜기처럼 사막 지역을 오가던 상인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중계 무역지로서의 역할이 이 도시에 재미있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아닌가 싶다. 금세공과 유통을 비롯한 상품의 유통업, 그리고 금융산업의 발전 등에 힘입어 부를 쌓은 두바이는 중동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모래밖에 없었을 이 땅에 도로가 깔리고 물길이 생기고 그렇게 생겨난 도시에, 보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와 디자인의 건물들이 늘어선 풍경. 이 모든 것이 불과 50년이라는 세월이 일구어 낸 것이라니 이 지역의 원주민들, 특히 중장년층 원주민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쉽게 가늠되지 않는다.


두바이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으러 두바이 도로교통국(RTA) 사무실에 간 적이 있었다. 이곳은 인샬라의 나라이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것을 빠짐없이 준비해 다 하더라도 어떤 직원한테 걸리는지에 따라 운이 나쁘면 운전면허증을 한 번에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였다. 한껏 긴장한 나는 목욕재계하고 정화수 떠놓고 신께 기도를 올리는 심정으로 준비해 간 서류를 내밀었다. 자세는 매우 공손하게 표정은 최대한 해맑게.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몹시 친절한 분을 만나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 그때 그 담당자는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이 지역 전통의상으로 휘감은 중년의 아저씨였다. 최대한 잘 보이고 싶어서 그분이 던지는 조크에 내가 너무나도 성실히 반응을 보였던 걸까? 아저씨는 기분이 좋으셨던지 내친김에 두바이와 그 근교의 가볼 만한 곳들을 추천해 주시기도 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자리 뒤쪽으로 난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두바이가 짧은 기간에 얼마나 놀라운 성장을 이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라떼는 말이야, 이 RTA 사무실 주변이 다 사막이었어. 이런 휘황찬란한 건물 같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고."


RTA 직원 아저씨의 말마따나 오늘날의 두바이에는 딱 봐도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는 건물들이 즐비하다.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한나절이 후딱  정도. 돛단배 모양을 한 7성급 호텔로 유명한 버즈 알 아랍(Burj Al Arab Jumeirah),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부르즈 칼리파(Burj Khalifa), 야자수 모양으로 만들어진 인공섬인 팜 주메이라(Palm Jumeirah) 이외에도 두바이의 전통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알 파히디(Al Fahidi Historic District of Dubai), 두바이를 품은 거대한 액자, 두바이 프레임(Dubai Frame), 건물 전면에 새겨진 아랍어가 인상적인 미래 박물관(The Museum of the Future) 등. 과연 두바이는 디자인에 방점을 찍은 도시라 할만하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두바이는 전 세계 246개 도시가 속한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UCCN: The UNESCO Creative Cities Network)의 일원이자 중동 지역에서는 최초로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단다.


나와 울 낭군이 부부라는 이름으로 연을 맺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된 십 년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무려 일곱 차례나 이사를 했다. 여행지가 아닌 삶의 공간으로서 새로운 도시를 만날 때면 먹거리와 잠자리를 해결한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마음에 드는 도서관을 찾는 일이었다. 그런 곳을 발견하면 분명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수시로 방문할 테니 집에서 오가기 부담스럽지 않은 거리에 있는 도서관이라면 좋겠고 여행이와 함께 다닐 곳이니 어린이책도 잘 구비되어 있으면 좋겠고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분위기도 멋진 곳이라면 더욱 좋겠다.


꿈이 야무지다고?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은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헤맨 끝에 다행스럽게도 이제껏 거쳐온 동네들에서 우리의 '단골 도서관'을 찾을 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두바이에서도 마음에 쏙 드는 도서관을 발견했으니까. 게다가 그곳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디자인 창의도시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짙게 묻어나는 곳!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Al Safa Art & Design Library)은 1989년에 지어진 후 두바이 공공도서관의 일부로 사용되어 오다가 몇 년 전 전면적인 개조작업을 거쳐 다시 대중에서 공개되었다 한다. 이름에 아트와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부터 범상치 않다 싶더니만 과연! 직접 살펴본 그곳은 전통적인 도서관과는 확연히 다른,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공간이었다.



디자인을 비롯한 예술 관련 서적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장르의 도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어린이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고 시청각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공간도 잘 마련되어 있어 아이와 함께 방문하기에도 좋다. 애초에 방문하려던 도서관이 하필이면 공사로 임시 휴관을 한다 해서 차선책으로 택한 곳이 이렇게나 마음에 쏙 들다니! 때마침 공사를 해준 동네 도서관에 감사 편지라도 띄우고 싶은 심정이다.



우리 가족, 특히 나와 여행이는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을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다. 도서관이 여행이의 학교와 울 낭군의 회사 중간쯤에 자리한 덕분에 나나 여행이가 별다른 일정이 없는 날에는 하교하는 여행이를 태우고 바로 이곳으로 내달린다. 여행이가 어린이 열람실에서 팝업북을 갖고 놀거나 제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를 때면 나는 바로 옆 열람실로 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빠르게 뽑아 든다. 갈 때마다 신기하게도 사람도 별로 없어 어린이 열람실에는 여행이 혼자, 예술책들이 모여 있는 열람실에는 나 혼자만 있을 때도 많다. 덕분에 여유롭게 시간을 때우다 울 낭군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도서관을 나서서 온 가족이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식이다. 또 어떤 날은 그림 그리기를 즐기는 여행이가 인터넷에서 찾은 파울 클레(Paul Klee)의 그림을 따라 그리고 있길래 내친김에 같은 작가의 화집을 함께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차를 몰고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으로 향하기도 했다. 도서관의 이름에 걸맞게 예술 관련 이론서부터 작가들의 화집까지 워낙에 잘 갖춰져 있는 터라 때로는 나 혼자서도 도서관을 방문해 오아시스의 물을 마시듯 멋진 그림들로 목을 축이곤 한다.


일상에서 벗어난 풍경과 경험을 만나기 위해 새로운 곳으로 떠나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새로운 공간에서 익숙한 것들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초행길은 아니었지만 일상의 배경으로서 다시금 두바이를 만났을 때 나는 이 도시가 참 낯설었다. 세계 최고니 최대니 하는 수식어를 단 멋진 건물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은 몹시도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이 대부분이었던 탓에 나는 편안함보다는 차가운 느낌을 더 크게 받았던 것 같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같은 이 도시에 내가 좋아하는 장소가, 그래서 마음 편히 종종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하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의 난 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아 나도 그동안 친근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를 여럿 찾았다. 그중에서도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은 뜻하지 않은 선물이었기에 더욱 반갑고 고마운 존재다.



INFORMATION

알 사파 아트 앤 디자인 도서관(Al Safa Art & Design Library)

주소: Al Wasl Rd, Jumeirah, Jumeirah 3, Dubai, UAE

전화번호: +971 800 33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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