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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은주 Aug 23. 2023

바람과는 애증의 관계예요

제주 밤산책 일기_822

밤 8시.

어제 하루를 걸렀더니 오늘은 온종일 이 시간이 기다려졌어요.

밤산책도 매일 하다 보니 습관이 된 걸까요.

하루라도 빼먹으면 뭔가 해야 할 일을 건너뛴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마치 오늘 숙제를 내일로 미룬 것처럼 말이죠.  


사람도 그러할까요? 매일 보던 사람이 잠시라도 눈에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지고 그리워질지.

아마도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한 집에서 매일 같이 보고 사는 사람이 있는데 한 두 달 여행을 떠났다 온다 해도 그립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아요.

음... 너무 오랫동안 보아와서 그럴까요. 어디에 있든 '마음은 항상 곁에'란 말로 퉁칠까 싶어요.


오늘은 산책 내내 바람이 꽤나 거세게 불어왔어요. 그나마 조금 선선해져서 기분은 좋았답니다.

바람에 머리칼이 정신없이 휘날렸지만 사실 이 정도의 바람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편이죠.

어디엔가 이런 문구를 쓴 적이 있어요.


'돌, 바람, 여자... 그중에 으뜸은 바람이라!'


예부터 제주도를 삼다도라 불렀다 하죠. 돌과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해서 말이에요.

돌은 속된 말로 완전 널렸습니다. 아주 지겹도록 보고 있어요.

여자, 이건 옛말이듯 싶어요. 요샌 남자가 더 많은 것 같거든요.

바람... 많아도 너무 많은 듯. 시도 때도 없이 불어옵니다. 머리칼이 얌전하게 붙어 있을 새가 없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물론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아요. 바닷가든 산 꼭대기든 장소도 가리지 않죠.

 

그래도 한 번씩 거센 바람이 고마워질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나 무언가 잘 풀리지 않는 날에 휘몰아치는 바람 가운데 서 있으면 가슴이 탁 트이거든요. 해방감이 들기도 하고요. 제주의 바람은 밀어낸다기보단 감싸 안는다는 기분이 들어요. 귀찮게 굴지만 때론 위안을 주는 존재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저와는 애증의 관계랍니다. 아마 섬사람들 대부분이 같은 마음일지도 몰라요.


현관문 앞까지 따라온 바람이 번개라는 친구를 데리고 왔네요.

서쪽 하늘이 갑자기 번쩍이더니 순간 낮처럼 환한 세상이 펼쳐졌어요. 혹시 이건 내게 주는 선물?

다행인지 천둥은 함께 오지 않았어요. 너무 멀리 있나 봅니다.

바람과 번개는 몰라도 사람은 잠을 자야 하니, 아쉽지만 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습니다.

오늘은 이만, 굿나잇!


TMI.

며칠 전 달님과 별님에게 빌었던 소원은 접수부터 사후 처리까지 완벽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도 수돗물이 잘 나왔거든요. 수압이 약해 졸졸거리긴 했지만.

그래서 다시 믿어보기로 했답니다. 소원의 힘을. 큰 소원을 빌고 싶어서 보름달이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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