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어디쯤 와 있을까?
파리를 찾은 건 15년 만이다.
대학교 3학년 때 친구와 배낭여행을 하러, 그리고 지금은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놀라우리만치 변치 않은 모습에 잊고 있었던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때의 파리는 소복한 눈에 온통 하얗게 덮여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싱그러운 초록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
당시에는 (볼 줄도 모르는) 지도를 펼쳐든 채 골목 여기저기를 발로 누볐던지라 머리보다는 몸으로 기억하는 파리의 구석구석이 낯설지만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어렴풋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추억의 잔상들이 눈앞의 광경과 겹쳐질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반가워, 오랜만이야.
골목골목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불란제리며, 오래된 카페들, 튈르리 공원의 초록 철제 의자들과 회전목마, 정겨운 메트로 사인과 심지어는 쿰쿰한 찌린내 하며 수동으로 밀고 나가던 지하철 역 탈출구. 세련되었지만 과하게 멋 내지 않은 파리지앵들과 그들을 에워싼 고풍스러운 파리의 건물들, 테라스에 심어진 빨간 꽃들까지. 고작 몇 주 머물다 간 관광객으로 파리의 겉모습만 훑고 간 것임에도 변치 않는 파리의 모습에 안도하는 건, 단순히 이 도시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아니면 완벽히 보존된 나의 스물두 살 그 시절 때문일까.
오랜 세월 변치 않는다는 것은 곧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하다. 유지하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따라 변화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방치하는 것과는 다르다.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도, 지켜내야 하는 것도 많다. 그 고집스러움 때문에 융통성 없고 콧대 높다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그 우직함 덕분에 역사와 문화를 지켜냈다. 지금의 파리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 속에 지켜진 곳이다.
오래전 네팔의 작은 산골 마을인 '날랑'에 방문한 적이 있다. 같은 곳을 3년 뒤 다시 찾았다 너무 놀랐던 기억이 났다. 인터넷은커녕 전기도 수시로 끊기고, 흙으로 지어진 집에서 불을 때며 자급자족하며 지내던 마을에 유일하게 있던 숙박시설은 '아메리칸 스타일' 리조트로 탈바꿈하였고, 사람들은 손에 쥔 휴대폰으로 페이스북에 접속하고 있었다. 찬물이 시간에 맞춰서 쪼르르 나오던 샤워기에서는 더운물이 상시로 콸콸 쏟아졌다. 일하던 직원들과 동네 사람들 모두 그대로였지만 3년 전 모습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가지 감정 속에 실망감이 크게 다가왔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이 나를 너무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과연 무엇에 실망한 것인가?
이기적 이게도 시드니라는 대도시에 살며 나는 그동안 누릴 수 있는 사치는 모두 누려왔다. 여기서의 사치란 흔히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 버튼 하나로 들어오는 전기, 어디서든 접속 가능한 휴대전화와 인터넷, 난방, 자가용, 언제든 살 수 있는 신선한 식료품 등이다. 사치라고 칭하는 이유는 대도시에서는 당연하다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곳이 아직 많이 있기 때문이다. 네팔도 그런 곳 중 하나였고 개발도상국의 당연한 수순을 밟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나는 실망했던 것일까?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고 눈물을 흘렸으면서 발전한 모습을 보고 실망하는 모순적인 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그들이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세상과의 소통이 단절된 채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한 것이 아님에도 편치 않은 무언가가 마음속 깊이 파고 들어와 무겁게 짓눌렀다.
처음 날랑에 의료봉사를 갔던 날이 떠올랐다. 진료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이 심심하지 않게 색연필과 그림이 프린트된 종이를 주었을 때의 표정이 기억났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내가 뭘 하면 되죠?'라는 표정으로 말똥말똥 쳐다보는 눈망울이 귀여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색칠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아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어 너도나도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진료가 끝나고 숙소로 걸어 올라오면 동네 어르신 몇 분이 언덕 위에 앉아 저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 뒤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밤이 되면 온 동네에 암흑이 내려앉아 촛불에 서로의 얼굴을 밝혔고, 창밖에는 은하수로 수놓아진 하늘이 반짝였다. 숙소의 마당에 누워있자면 별똥별이 자꾸만 떨어져 눈으로 들어올 것만 같은 기분에 눈을 계속 깜빡이게 되곤 했었다.
전기와 인터넷이 들어오고 와이파이가 터지자 마당에 누워도 하늘은 까맣게만 보였다. 은하수도 별똥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당 옆 화장실의 불이 계속 켜져 있는 것도 신경이 쓰여, 식당으로 들어와 예전에는 없던 메뉴인 탄두리 버터치킨을 먹으며 한 손으론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상황이 나아져서였을까?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선뜻 적정 금액을 받고 수도에서 날랑까지 와서 진료를 해주겠다는 의사를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이 나의 마지막 방문이 되었다. 외부인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 그 궁극적인 목표가 빠르게 달성이 되자 금전적인 도움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실망한 것은 그곳에서 느낄 수 없던 옛 시절 추억에 대한 상실감과 그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희미해진 나의 존재감 때문이었을까? 확실한 건 이것은 지극히 내 중심적인, 이기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고 모두는 좀 더 편리한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
급격한 변화에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된 한 곳과, 다가오는 변화를 온몸으로 막아가며 변치 않기 위해 애쓰는 곳 중 어디가 옳고 어디가 그르다 따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단편적 모습만으로 감히 문화와 경제, 종교, 예술과 삶을 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혀 다른 출발점과 방향성을 갖고 있는 두 나라를 보며 내 삶 속에 지켜야 할 것과 발전해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
방문할 때마다 변하는 고국의 모습도 이제 이틀 뒤면 확인할 수 있다.
7년 만이다. 한국은 7년간 어떤 것을 지켜왔고, 어떤 것을 변화시켜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