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한적한 오후의 꽤나 진지한 대화
지난 목요일 로또의 당첨금은 20 밀리언 달러. 무려 18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하지만 당첨자는 나오지 않았고 다음 주 목요일 당첨금은 60 밀리언 달러(540억 원)로 늘어났다. 목요일 8시가 지나기 전까진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 금요일 낮, 남편과 하버브리지를 차로 달리며 실없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눠본다.
나: 60 밀리언에 당첨되면, (창 밖을 가리키며) 저기 보이는 시드니 하버뷰의 통유리 집을 살까? 아니면 파리 시내에 아파트를 하나 살까?
남편: 우리 빛부터 청산하자. 그리고 둘 다 사지 뭐.
나: 그렇네. 둘 다 살 수 있네. 애들 방학마다 여행 다녀도 되겠지?
남편: 그건 좀 무책임하지 않을까? 병원은 어쩌고?
나: 뭐 어때? 일 할 수 있을 때 하고 놀 때 노는 거지. 돈 벌려고 일하는 것도 아닐 텐데.
남편: 나 친구들한테 1억씩 떼어주고, 친구들 자식 한 명당 2천5백씩 학비 지원해 주기로 했는데 괜찮아? (진지하다)
나: 와이낫. 60 밀리언인데. 그런데 뭘 또 그리 구체적으로 정해놨대?
하긴, 남편은 당첨금 수령 시 보안 유지를 위해 인터넷으로 복권을 사는 법이 없다. 당첨금 수령하러 가는 계획까지 완벽하게 세워두었다.
구체적일수록 진지해진다.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나: 애들 방학마다 여행하면 정말 좋겠다. 학교 때문에 계속 떠나 있는 건 힘들 테니. 난 홈스쿨링은 자신 없어.
남편: 여행 말고 하고 싶은 건 없어?
나: 응 별로. 빚도 없다면 홀가분해서 더 자주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고. 집도 뭐, 굳이 안 사도 될 것 같아. 여행만 원 없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 그러더라고. 자유와 소유는 반댓말이라고. 그것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건, 세상엔 정말 다양한 생활 방식이 있다는 것 같아. 예를 들면, 우리가 저번에 컨택했던 핀란드에 사시는 작가 분 있잖아. 겨울시즌이 되면 북쪽으로 항상 스키 메고 훌쩍 여행을 떠나신다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야, 그렇지? 내 친구 xx도 이번에 유럽에 지내면서 산티아고 순례길 두 달 다녀왔더라고. xx 도 여행하면서 작업하고.
남편: 뭐라고? 순례길? 두 달?
나: 응. 멋지지?
남편: 전혀. 난 집이 제일 좋아.
나: 우리는 장소와 시간에 다분히 구애받는 일을 하잖아. 그렇다고 그렇게 길게 일을 뺄 수도 없고 말이야.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아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생활 방식이 있는지 알았으면 좋겠어. 집을 나서면 얼마나 큰 세상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고 느꼈음 해. 디지털 노매드란 말도 있잖아. 사실 노트북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는데 우린 그걸 못 누리며 살고 있네. 게다가 호주는 어디서든 머니까 잠깐 떠났다 오기에도 쉽지 않고. 그래서 더 멀리멀리 떠나고 싶어지나 봐. 쉽게 갈 수 없다면 이렇게 간절하지도 않을 것 같아. 그나마 우리가 시드니를 좋아해서 다행이야. 세상 그 어디에도 시드니만큼 살기 좋은 나라는 없는 것 같아.
남편: 그렇지, 여기선 어디 가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래도 호주보다 살기 좋은 곳은 많을 것 같은데? 난 집이 젤 좋지만.
지독한 집돌이이다.
나: 우리가 살고 싶어 했던 프랑스 있잖아. 시내에 집을 구하면 부엌 상판까지 본인이 다 설치해야 한대 (카더라 통신이다). 사람들이 이사 다니면서 부엌도 옮겨가지고 다닌다나 봐. 그럼 필요한 것 사서 배달 오는데 일주일, 설치기사 오는데 3주.. 옛날 호주 같은가 봐. 그런 거 본인이 하나하나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잖아. 일단 외국인으로서 방을 구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지만. 그래도 여긴 이제 많이 나아졌지.
예전의 시드니가 생각났다. 물론 이사 후 인터넷 설치하려면 3주나 기다려야 하는 건 변함없지만, 그 외의 것들에서는 일처리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뭐든지 '빨리빨리'를 원하는 이민자들이 바꿔놓은 많은 것 중 하나다.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하던 당일배송도 가능해졌고,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곤 하던 슈퍼마켓들이 이제는 자정까지 영업을 하는 것을 보면, 삶이 편리해진 것 같기도, 팍팍해진 것 같기도 하다. 쉼 없이 일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려면 나 역시 흐름을 따라야 하기에. 그래도 아직은 의지에 따라 충분히 여유 있는 삶이 가능한 곳이다. 젊을 땐 생각지 못하던 복지나, 자연환경, 그리고 유연한 근무시간 등이 가정을 꾸리고 보니 삶의 질을 상승시키는 직접적인 요인들이었다.
남편: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직업이면 떠날 거야?
나: 응. 시드니가 아무리 좋아도, 어차피 사는 거 다양한 걸 경험해보고 싶지 않아? 여기 조금, 저기 조금 살아보는 거지. 내가 이곳이 아니라 유럽으로 이민을 갔었다면 정말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 같아.
진로를 정할 때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이다. 장소에 구애를 받는다는 것은 노매드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땐 장소의 구애를 받지 않는 직업이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했다. 자택근무라는 말조차 생소했기에 물리적 제한이 내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남편: 난 그냥 이대로가 좋아. 복권 당첨돼도 그냥 똑같이 살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유럽이야? 동남아도 있고 미국도 있고, 다른데도 많잖아.
나: 동남아는 왠지 가성비가 좋은 느낌이라, 돈이 많다면 안 가고 싶을 것 같아. 가성비 따지지 않는 여행이 하고 싶어. 미국도 좋은데 유럽은 뭐랄까, 문화적으로 경험할 것이 너무 많아서 가도 가도 충분치 않은 느낌이라. 게다가 마지막 파리 여행의 너무 여운이 길게 남아있어. 난 아직도 그 여행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
남편: 음, 자기 컬렉터의 기질이 있네.
나: (화들짝 놀라며) 내가?
미니멀리스트가 되고픈 나에게 컬렉터의 기질이라니.
남편: 응 컬렉터. 모으는 거 좋아하는.
나: 아, 경험의 컬렉터 말하는 거야 혹시?
남편: 응. 뭐든 다 경험해 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자기한테선 컬렉터의 기질이 보여.
경험의 컬렉터. 생각지 못했던 표현이다.
나: 듣고 보니 그렇네. 마져. 내가 추구하는 삶이 그런 것 같아. 나 이번에 한국 갔을 때 많은 걸 했음에도 별로 충족되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새로운 경험을 컬렉트 하지 못해서인 것 같아. (묘한 깨달음이 찾아온다.) 다음에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떠나보고 싶어.
남편: 나 일단 복권은 사뒀어. 남은 건 기도뿐이야.
돈이 많아도 지금의 삶을 바꾸고 싶지 않다는 남편이 오히려 행복한 쪽일지도 모르겠지만, 누구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마음쯤은 품고 사는 것 아니던가. 일단은 당첨된다면 남편이 같이 떠나 주겠다 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다음 주 목요일까지, 예비 500억 당첨자로 살아가는 기분은 꽤나 근사하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유달리 아름답다. 이왕이면 예비 말고 그냥 당첨자로 살아가면 더 근사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