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결국 어딘가로 다녀오는 여정 아니던가. 장소 또는 공간이 차지하는 범주가 절대적일 수밖에 없다. 육지와는 사뭇 다른 풍광의 바다, 오름, 숲이 마음을 일렁이는 제주라고 다를까. 그 풍광 속에 애써 멋스럽게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꽤 맘에 드는 기념사진을 남기게 하는 제주의 카페들은 그 자체로 목적지가 된다. 문제는 (2021년 10월 기준) 인스타그램 해시태그 #제주카페 게시물 수가 무려 262만, #제주카페투어 게시물도 29만에 달하니 아무리 알고리즘이라는 녀석이 우리의 취향을 파악해 추천을 해준다 해도 넘쳐나는 정보에 질려버릴 때가 있다.
여기에 충분히 단정하고, 제주-스러우면서도, 소란하지 않은 카페들이 있다.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자연스레 내 말소리를 낮추고, 커피 내어주는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배시시 웃으며 공간 구석구석을 살피게 되는 곳들. 그러니까 가만히 제주에서의 그 시간에 몰입하게 만드는 공간들 말이다.
모립
입간판에 새겨진 이름을 가만히 읽는다. 음의 길이나 음색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삼각형 콜론을 가운데 두고 나란한 두 글자. 모립ː몰입. 돌담 두른 오래된 주택을 단장한 카페 모립은 얼핏 보면 ‘그냥 일반 주택인가 보다’ 하고 지나칠 법한 무던한 모습인데, 그 무던함이 이 공간을 도드라지게 한다. 애월이니까. 유명 카페, 베이커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어 활기차지만 어수선하기도 한 애월 해변 언덕에 이토록 튀지 않는 공간은 분명 반전이다.
마룻바닥과 돌벽, 미닫이문 너머 초록의 수목이 우거진 마당, 향 내음, 그리고 드립 커피.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가 ‘쉿’ 고요를 강요하지 않고도 모립의 서정적 요소들은 고요라는 암묵적 규칙을 만들어낸다. 원두에 수국, 오죽, 돌담이라는 이름을, 시그니처 향에 바당, 보롬, 오름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도 모립이 지향하는 태도가 느껴진다. 느긋한, 그러나 나른하지 않은, 모립은 시간으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모립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로1길 26-7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moripcoffee/
고요새
고요하고 오롯한 나의 요새. 줄여서 고요새. 고요새에는 ‘혼자’를 위한 공간이 있다. 두 개 층 가운데 위층은 ‘나’에게 편지를 쓰는 리추얼을 통해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1인 좌석으로만 공간을 구성했다. 빛과 어둠은 늘 함께라는 걸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인위적 조명은 최소화했다. 내면의 위로, 마음의 정리가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요새가 될 수 있도록. DM 예약을 우선으로 하되, 여석이 있을 때에는 바로 이용할 수도 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는 하늘, 삼양의 파아란 바다, 겨울에도 싱그러운 초록 이파리를 내보이는 야자수가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오는 아래층에서는 커피와 차, 그리고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쁘게 만든 다과를 준비해 두고 있다. 테이블과 의자에서 느껴지는 옹이의 질감, 흙으로 빚은 식기, 어머니께서 오랜 시간 모아 온 소품들이 한데 어우러져 듣고 또 들어도 정겨운 옛이야기를 속삭이는 것만 같다.
고요새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선사로8길 11 고요새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goyosae__/
숨도
숨이 모여 쉼이 되는 정원이라고 했다. 숨도. 오랫동안 석부작박물관으로 운영되었던 곳이다. 용암석과 야생화가 어우러지는 정원을 재정비를 하면서 정원 속에 자리하고 있던 제주 전통 초가를 카페로 단장했다.
기민석 작가의 목재 가구, 조원재 작가의 백자 조명 등 젊은 공예가들의 솜씨가 공간에 녹아드는 가운데 유약을 바르지 않은 제주 옹기, 대나무로 역은 차 바구니 등의 전통 공예품들이 배치되어 마치 갤러리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단순한데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세심하게 신경 써 만든 공간이란 게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 그렇다고 엄격한 공간은 아니다. 반려동물을 위한 급수기를 마련한 데서 좋은 것을 함께 즐기고자 하는 숨도의 마음이 충분히 느껴진다. 차분히 숨 고르기 좋은 공간임이 틀림없다.
숨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일주동로 8941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cafe_soomdo/
홉히워크룸
디카페인 커피 브랜드 홉히워크룸은 로스팅 작업실이다. 원두 판매가 기본이고, 영업시간 중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 융드립 커피를 판매한다. 융드립은 커피 가루를 플란넨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추출하는 방식. 융 주머니에 커피 가루를 담고, 물을 끓이고, 천천히 물을 붓기 시작하면 그보다 더 천천히 아래에 받친 잔으로 커피가 똑똑 떨어진다. 군더더기 없는 바리스타의 움직임에 잠시 ‘융멍’에 빠졌던 손님들은 커피를 받아 들고 퍼뜩 정신을 차린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곤 또 한 번 놀란다. 디카페인인데? 물론 카페인 듬뿍인 커피도 있다. 정신이 든 건 카페인이 있고 없고 때문이 아니다. 진심 맛있다. 커피 열매가 간직한 오일 성분까지 추출되는 융드립 특유의 깊은 바디감에 깜짝 놀라게 되는 것. 부드러운 크림이 올라간 크림커피 역시 홉히워크룸의 시그니처. 커피 맛에 제대로 빠져 융드립 하나, 크림커피 하나 그렇게 1인 2커피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홉히워크룸 되시겠다. 자리는 없다. 오직 테이크아웃. 그럼에도 오후 3시가 되기 전에 커피 주문이 마감되기 일쑤이니 방문 전 SNS 체크가 필수.
홉히워크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이어도로 882
홈페이지: https://www.instagram.com/hop.hi_/
글·사진 서진영 트래비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