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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Dec 20. 2021

아무르만을 보며 즐기는
러시아 전쟁사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박물관 여행기

직항과 저비용항공사가 취항하며,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에게 친근한 도시가 되었다. 3시간 만에 갈 수 있는 유럽이라는 카피도 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에 있어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적으로 유용한 도시다. 태평양 지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요새를 건설했다. 러일전쟁을 거치며 주변부를 보강했으며, 전쟁 후에는 드러난 단점을 전면적으로 개선하기까지 했다. 러일전쟁의 판세를 좌우했던 뤼순 공방전의 뼈아픈 패배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요새를 더욱더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극동의 유일하다시피한 항구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야 했던 것이다.



요새 규모는 상당했다. 수십 문의 포대를 설치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든 시설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했으며, 지하로 통신 케이블을 연결하기까지 했다. 지금처럼 전기나 통신 설비가 흔했던 시기가 아니었지만, 그들은 진심이었다. 여기에 강력한 포격을 받아도 견딜 수 있도록 콘크리트 벽을 두껍게 만들었다. 이후에도 강도와 안정성을 위한 보강 조치가 꾸준히 이루어졌다. 요새는 점점 거대해졌다.
 


러일전쟁의 패배는 러시아에 큰 충격을 주었는지, 요새 증축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며 시멘트 보급이 어려워졌고, 결국 요새 건설은 중단되고야 말았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몰락하고 있었다. 2월 혁명으로 내전이 발발한 시기였다. 일본은 그 틈을 노려 만주와 시베리아 진출을 시도했다. 러시아 내전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볼셰비키 적군 세력은 서부에 군사력을 집중하기 위해 극동 지역에 '극동공화국'을 세웠다. 여러 세력이 뒤엉켜 있는 상황을 정리하고 극동에 안정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사이, 일본은 만주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다시 총부리를 시베리아 지역, 그러니까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볼셰비키 적군 세력은 일본의 시베리아 진출을 막기 위해 그들과 협정을 맺었다. 조건은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의 무장 해제였다.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는 그렇게 완성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블라디보스토크 요새의 무장 해제가 이루어진 후 80여 년이 흘러 1990년대가 되었다. 요새는 옛 모습 그대로 방치된 채 흉물이 되어 있었다. 지방 정부는 이 자리에 박물관을 세우기로 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네임리스' 포대가 있는 위치를 낙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군기지가 있는 금각만 서쪽 해안가, 아우르만을 바라보고 있는 언덕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박물관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격동의 세계사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에 사용했던 총기류를 비롯해 여러 군사 장비, 시설, 각종 이야기 등을 소개한다. AKM, Kar98k 등등 알 만한 사람들은 안다는 온라인 게임, '배틀그라운드'에 등장하는 여러 총기류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상당수의 장비는 직접 만져보는 것도 가능하다. 몇몇 포대는 자리에 앉아 이리저리 조작할 수도 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여러 군사 장비를 실제로 보고, 만져볼 수 있다는 점이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박물관의 매력이다. 전쟁 역사를 다루는 박물관답게, 19세기보다 훨씬 더 이전에 발생했던 여러 전쟁에 관해서도 다룬다. 유라시아 전쟁사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몽골군의 갑주, 무기도 이곳에 남아 있다. 밀리터리 마니아라면 분명 만족할 만한 전시.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블라디보스토크 요새박물관은 한 번쯤 들를 만하다. 포대 너머로 탁 트인 아무르만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니까. 뻥 뚫린 하늘과 바다는 러시아 극동 지역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품어내고 있다. 난간 쪽에 설치된 망원경을 통해 풍경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도 좋겠다.



블라디보스토크요새 박물관
위치: Batareynaya Ulitsa, 4а, Vladivostok, Primorsky Krai, 러시아 690091
관람요금: 성인 200루블
운영시간: 10:00~18:00



글·사진 김정흠 트래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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