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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Mar 20. 2017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기술

그래도 우리 ‘함께’여서 다행이야 

미술관을 돌아보고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나누어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아름다운 여행이 될 거라 착각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란 
집 밖의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걸 떠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조지아 아할치헤 라비트 궁전. 꽤나 다정한 모습이지만 알고 보면 칭얼대는 아이를 달래는 중이다
모스크바 크루치츠코예 수도원. 13세기에 지어진 유서 깊은 사원이지만 어린이 여행자에겐 그네가 있어서 좋았던 곳으로 남아 있다
1 밤12시가 넘도록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던 여름의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2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과도 같은 피의 사원. 이 거리는 내게 아이를 안고 걷던 고행의 길로 각인되어 있


*서현경 작가는 <내 안의 그대, 러시안 블루>, <Check-In 러시아>를 썼다. 올해 11살이 된 딸 윤서와 여행하며 함께 성장 중이다.  blog.naver.com/hkseo603 






6살 상처투성이 첫 여행, 러시아

“이 아이, 이따가 울 건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으로 들어서는 우리에게 표를 받는 할머니가 아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람. 아이가 이따가 울지 안 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날은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기대했던 발레 공연 <백조의 호수>를 보는 날이었다. 여행 한 달 전에 한 자리에 15만원이 넘는 좋은 자리를 예매한 터였다. 하지만 들어갈 때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6살 꼬마가 과연 3시간이 넘는 공연을 잘 버틸지, 나는 과연 이 공연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아이랑 발레를 본다는 게 괜한 욕심이었나 싶었는데 입구에서부터 할머니가 태클을 건 것도 모자라 객석 앞자리에 앉은 중년 부인이 노골적으로 우리가 뒤에 앉는 것을 경계했다. 마치 ‘자리 잘못 잡았네’ 하는 표정으로 아이를 자꾸 쳐다보았다. ‘아줌마! 우리 애 아직 아무것도 안했거든요!’ 이렇게 큰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울면 안 돼! 불 꺼지면 절대 큰 소리로 말하면 안 돼! 발장난 하면 안 돼!” 


아이에게 ‘안 돼’를 백번쯤 얘기하고 나니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린스키 극장에서 보는 백조의 호수라니 과연 대단하다,라고 느끼기도 전.


“엄마, 나 쉬 마려워.”


아, 수많은 “안 돼” 중 이건 생각도 못했다. 결국 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입구에 있는 직원이 1막이 끝나기 전에는 다시 들어갈 수 없단다. 아이는 허탈한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도를 뛰어다니며 신이 났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멍하니 있으니 카페테리아에 있던 여직원이 들어오라며 손짓한다. 그리고는 냉수 한 잔을 주며 내 어깨를 토닥인다. 마치 네 맘 다 안다, 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1막을 통째로 날리고 다시 들어간 극장에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한편으로 다행이다 싶었다가도 공연 중 때때로 아이를 깨우고 싶은 욕망과 싸웠다. 이게 얼마짜린데, 같은 예술과 어울리지 않는 마음까지 들었다는 것도 고백한다.


마음에 상처만 남긴 공연이 끝나고 나니 밤 12시가 다 되었다. 곧장 모스크바로 가는 야간기차를 타러 가야 했다. 잠든 아이를 업고 맡겨 두었던 트렁크를 찾아 이고지고 역에 도착해 겨우 기차에 오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아이가 잠결에도 절대 혼자 눕지 않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그 좁디좁은 침대에 반만 걸쳐 누우니 기차가 출발했다. 해가 지지 않는 백야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뒤로하고 모스크바로 가는 길. 이대로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땐 우리 집 침대였으면, 하고 그 순간 간절히 바랐던 것 같기도 하고.      


▶tip 욕심을 줄이자
너무 어린아이라면 함께 보는 공연의 수준과 시간대를 잘 선택하는 것이 좋다. 6살에 공연 내내 애를 먹였던 아이는 9살 때 똑같은 극장에서 공연을 보았지만 관람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엄마의 욕심을 조금 줄이는 것도 여행의 기술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여행 중 어떤 박물관이나 유적보다 아이를 사로잡았던 호숫가. 아이와의 여행이란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때도 있다
바르샤바 문화과학궁전. 저 쨍한 하늘은 연일 38도를 넘나드는 폭염을 뿌리며 우리를 지치게 했다
쇼팽 박물관 근처 악보가 그려진 담벼락. 쇼팽의 나라답게 곳곳에 음악에 관한 상징들이 많다






9살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던 여행, 폴란드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하니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혼자 여행하던 때만 생각하고 덜컥 예약했던 야간 버스는 생각보다 훨씬 불편하고 힘들었다. 아이는 그 좁은 좌석에서도 잘 자는 것 같았지만 나는 한숨도 못 자고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내게 기대어 자다가 가끔씩 뒤척이는 아이가 깰까 봐 자세도 바꾸지 못하고 삐딱하게 앉아 온 탓에 더 피곤했다.


미리 호텔에 신청해 둔 얼리 체크인만 믿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얼리 체크인이 안 된단다. 따질 힘도 없어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으니 몸이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았다. 그대로 잠들고 싶었지만 바르샤바는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었다. 오늘과 내일이면 이 여행도 끝인 것이다. 그러니 얼리 체크인이고 뭐고 하나라도 더 보러 다니자는 다짐으로 호텔을 나왔다.


우리가 향한 곳은 쇼팽 박물관. 마침 피아노를 열심히 배우는 중이었던 아이에게 쇼팽을 알려주고 싶었다. 아직 쇼팽을 치려면 멀었지만 나중에 언젠가 쇼팽을 치게 될 때 엄마와 함께 갔던 바르샤바 여행과 박물관을 기억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엄마, 다리 아파.”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길을 걸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리가 아프다고 투덜댔다.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너는 버스에서 잠이라도 잤지. 엄마는 한숨도 못 잤단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힘들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니? 겨우 이만큼 걷는 것도 힘들면 뭐 하러 엄마를 따라서 온 거야. 나도 너랑 다니는 거 아니면 쇼팽 박물관 같은 데는 갈 생각도 안했을 거라고!’ 이렇게 쏘아대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조금만 가면 되니까 다리가 아파도 참아, 라는 말로 달래는 둥 마는 둥 그냥 걸었다. 아이도 나의 냉랭한 말투에 눈치가 보였는지 잠자코 따라오는 것 같았다. 


“엄마, 피! 피가 나!”


한 발짝 뒤따라오던 아이를 돌아보니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방을 뒤져 휴지를 찾았지만 매일 가지고 다니던 휴지는 보이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목에 둘렀던 스카프를 빼서 아이의 코를 막았다. 길거리 한복판에 서서 피를 흘리는 아이를 잡고 있으니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스카프가 흠뻑 젖도록 피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겁이 덜컥 났다. 단순한 코피가 아닌 게 아닐까? 이대로 피가 멈추지 않으면 어떡하지? 응급차를 불러야 하나, 병원으로 가야 하나? 아, 여행 따위 왜 온 거야!


“엄마, 이제 괜찮아.”


아이가 덜덜 떨리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피범벅이 된 스카프를 떼고 보니 코피가 멈춰 있었다. 안도의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섞여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모두가 내 탓인 것 같았다.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잠깐 쉬어 가면 될 것을. 뭐가 그리 급해서 너를 그렇게 닦달했던 걸까. 코피가 날 정도로 힘이 들었던 걸 엄마가 알지도 못하고 너보다 내가 더 힘들다고 하다니. 이렇게 이기적인 엄마가 어디 있을까. 


“우리 아이스크림 먹으며 좀 쉬었다가 갈까?”


“오예! 좋아!”


언제 피를 철철 흘렸냐는 듯이 아이가 좋아한다. 어쩌면 아이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것인데 나는 그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초코 맛 아이스크림, 조악하지만 귀여운 기념품, 맥도널드 해피밀 세트의 장난감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데 ‘안 돼’만 외치는 엄마는 집에서의 엄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야 그걸 알게 된 것이다. 그래 이까짓 아이스크림 하나에 네가 행복해질 수 있다면 오늘은 두 개를 사 줄게. 쇼팽 박물관은 뭐, 다음에 폴란드 한 번 더 오면 되지. 


▶tip 아이의 체력 안배에 신경 쓰자

아이들의 체력은 아무래도 어른보다 떨어진다. 어른을 기준으로 무리하게 많이 걷거나 야간 이동을 자주 하는 것은 아이가 힘들어해 병이 날 수도 있다. 특히 여행 초반에 아프면 전체 일정이 흔들릴 수 있으니 체력 안배에 신경 써야 한다.   

조지아 므츠헤타 즈바리 수도원. 성벽에 앉아 므츠헤타 풍경을 우리 품 안에 안아 본 순간
조지아 시그나기. 동화마을에 들어온 듯 아기자기한 풍경이 아이의 맘에 쏙 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의 장난






10살
어느새 여행자가 된 너, 조지아

이번 여행에서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간 여행 중에 매일 일기를 쓰라고 했던 것도, 여행지와 관련된 책을 가져와 읽으라고 했던 것도, 다 면제시켜 주었다. 대신 스마트폰을 가져가서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볼 수 있게 허락했고 자질구레한 것이라도 용돈 안에서 쇼핑을 할 수 있도록 자유를 주기로 했다. 여행을 떠나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아이도 느껴 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엄마, 여기서 사진 찍어야 하지 않아?”
“이건 먹어 봐야지.”
“이 숙소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마이너스야.”


아이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뜻밖에 잔소리 폭탄을 맞은 건 바로 나였다. 이제 제법 여행을 다녀 본 아이는 낯선 곳에서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다.


“잠깐만, 나 여기서 사진 좀 찍어 줘.”
“엄마 조금만 더 옆으로 가 봐. 거기 서야 사진이 잘 나와.”
“우리 아까 갔던 성당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친구한테 사진 보내 주려고.”


걷기만 하면 다리가 아프다고 하던 찡찡이, 새로운 음식은 먹어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던 고집불통, 보이는 것마다 다 사 달라고 졸라대던 막무가내 떼쟁이. 몇 년간 함께 여행을 하면서 나는 늘 아이의 이런 모습에 힘이 들었다. 좋자고 떠나온 여행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내 다시는 너랑 오나 봐라’ 다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나는 단단히 각오를 했었다. 

웬만해서는 화내지 말자, 여유 있게 다니자, 아이가 원하는 여행이 되도록 노력하자 등등. 생각해 보니 모두 아이가 여행 중 어떤 돌발 상황을 만들까 봐 미리 겁먹으며 한 다짐들뿐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그런 엄마의 걱정이 무색하게 어느덧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대체 옛날 조지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높은 데에 교회를 만들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거야!”
“신에게 더 가까이 가려고 그랬다잖아.”
“헐, 뭔 소리야.”


여전히 투덜대고 ‘헐’, ‘대박’을 번갈아 쓰며 엄마를 당황케 하는 대화를 이어갔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행 중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추억을 공유하는 사이가 됐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혼자 갈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데리고 갔던 첫 여행부터 지금까지 순전히 나만 좋으려고 떠났던 여행이었다. 그런 내게 아이는 빅사이즈 트렁크보다 더 크고 힘든 짐 보따리로만 여겨지는 순간이 많았다. 그런데 몇 년간 나의 협박과 엄포가 난무하는 여행을 견디며 아이는 어느덧 제법 어엿한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든 상관없는데 방학은 피해서 가자.”
“왜?”
“그래야 학교를 빠지고 가지!”


역시! 남들 안 갈 때 떠나는 게 진짜 여행이지. 안 가르쳐 줘도 이런 걸 다 아는 걸 보니 너는 여행자가 다 되었구나. 이렇게 된 이상 앞으로도 우리는 여행을 계속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애증의 시간을 거쳐 세상에 둘도 없이 잘 맞는 짝꿍이 되고 있는 아이와 나. 이런 날이 나에게도 올 줄은 몰랐다. 괜히 감격에 겨워 와인 잔을 채우니 아이의 잔소리가 날아든다.


“우리 내일 아침 일찍 나가야 하는 거 알지? 그만 마시는 게 어때?”
괜찮아.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나와 달리 아침잠이 없는 너는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나를 깨울 텐데. 정말 우리 함께여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그런 의미에서 딱 한 잔만 더 하는 걸로!  


▶tip 아이에게 자유를 주자
아이에게 여행 중 자유를 주면 엄마의 잔소리가 줄어들게 돼 사이가 돈독해진다. 일기나 독서 심지어 공부에 대한 부담이 없어진 아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을 훨씬 즐기게 된다. 여행 중에서만이라도 엄마의 욕심을 버리자. 엄마도 아이도 행복한 여행이 될 것이다. 


글·사진 서현경 작가  에디터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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