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마시는 ‘혼술’, 혼자 먹는 ‘혼밥’, 혼자 떠나는 ‘혼행’까지.
혼자서 즐기는 라이프가 대세처럼 자리한 시대에 함께하기를 고집하는 네 남자.
그들의 브로맨스*를 엿봤다.
*브로맨스Bromance |‘브라더(Brother)’와 ‘로맨스(Romance)’를 조합한 신조어. 남자끼리 갖는 애틋한 우정을 뜻한다.
여행에서도 첫 단추가 중요해
네 사람은 직장 동료였다. 에어비앤비 코리아에서 함께 일했다. 거의 매일 보는 직장 동료끼리 얼마나 더 보려고 여행까지 같이 다닌 걸까? “첫 여행지가 사이판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같이 안 다녔을 거예요.” 네 남자가 입 모아 말했다. 2016년 봄, 넷이 처음으로 같이 여행한 사이판은 동환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동환은 자신의 지식과 인맥을 총 동원해 완벽한 가이드 역할을 했다. 현지인들만 아는 맛집을 탐방하고, 별이 쏟아지는 고요한 밤하늘 아래 맥주캔을 기울이고, 바나나보트 위에서 스릴을 즐겼다. 최고의 여행이었다.
네 남자는 사이판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을 상기하며 다음 여행, 그 다음 여행을 계속 도모했다. 그러다 보니 1년 사이에 보라카이, 라스베이거스, LA, 제주도, 속초, 강릉, 경주, 태안 등 10번이 넘는 여행을 넷이서 또는 그중 셋 또는 둘이서 함께 다녔다. 하지만 이후의 여행은 그들 스스로 ‘형편없는 여행’이라 이름 붙일 정도로 웃기고 조금은 바보 같았다. 그래도 사이판에서 시작된 우정 위에 두터운 추억을 쌓고 또 쌓을 수 있어 매번 즐겁고 의미 있었다. 첫 여행의 단추를 잘 꿴 덕이다.
달라서 또 같아서
항간에 두 가지 반대되는 설이 떠돈다. ‘성격이 서로 달라야 친하게 지내기 쉽다’라는 설과 ‘성격이 서로 비슷해야 친하게 지내기 쉽다’라는 설. 네 남자는 달라서 친해진 걸까, 비슷해서 친해진 걸까? 처음엔 전자 같았다. 맏형인 태헌은 ‘멍 때리기’가 특기지만 먹을 것을 결정할 때엔 엄청난 리더십을 발휘한다.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워커홀릭인 인영은 여행지에서도 스마트폰, 태블릿PC, 노트북까지 3종 세트를 품에 꼭 지니고 다닌다. 잠이 많은 성종은 이동 중에도, 술자리 중에도, 머리만 대면 잠을 잔다. 잠자는 사진이 여행 사진의 반이다. 진지한 성격의 동환은 이 중에서 유일하게 여행 계획을 짜는 사람이다. 운전도 그가 거의 도맡아 한다. 서로 너무 달라 보이는데 어떻게 그리 잘 다니는 것인지 궁금했다. 동환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서 같이 다닐 수 있는 것 같아요. 진짜 성종 형처럼 다 잠만 자거나, 태헌 형처럼 먹고 싶은 음식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면 어떡해요? 저는 여행 계획 짜고 운전하는 게 안 힘들어요.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인영 형이 옆에서 스마트폰으로 지도를 잘 봐줘서 편하기도 하고요.”
잠만 잔다는 성종에게도 사실 큰 역할이 있다. 항공권, 호텔 등을 예약할 때 필요한 여행 경비를 곧잘 빌려 준다. “얘들이 저축을 잘 안 해요. 공인인증서 쓸 줄 모르는 사람(태헌)도 있고. 그래서 제가 매번 한꺼번에 결제하고 나중에 그들한테 여유가 생기면 받아요. 제 영어 이름이 제리 Jerry거든요. 그래서 ‘제리론 Jerry Loan’이라고 이름도 붙였어요.” 특유의 유머러스함으로 여행 중 웃음을 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너무 다른 네 사람의 공통점이 보였다. 불평불만이 없다는 것. 어떤 것도 크게 싫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즐길 줄 안다는 것. 달라서 또 같아서, 그렇게 같이 잘 다닐 수 있나 보다.
특별한 것 안 해도 재미있는 여행
남자 넷이 여행을 가면 무엇을 할까? 다른 남자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남자들은 ‘아무것도 안 하는 여행’을 추구한다. 어디를 가든 비슷하다. 시원한 맥주로 아침을 시작해 밤까지 맥주를 마시는 것, 회사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슬리퍼를 신고 현지인처럼 걸어 다니는 것, 그때그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는 것. “특별한 것을 안 해도 정말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형편없는 여행’이라고 하면서도 계속 가는 거죠.”
여행지는 주로 태헌에게 먹고 싶은 것이 생기면 결정된다. 태헌이 스마트폰 단체 대화창에 똑같은 음식 사진을 매일 올리기 시작하면, 그걸 먹으러 여행을 가자는 뜻이다. 나머지 세 사람에게서 “그래, 가자”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계속 보낸다. 그렇게 타이거 새우를 먹으러 보라카이에 갔고, 제철 오징어회를 먹으러 속초에 갔고, 어름돔을 먹으러 태안에 갔다. 먹을 것 위주로 여행지를 정하다 보니, 식비가 숙박비의 3배를 넘길 때도 있다. “태안에 갔을 때 8만원짜리 숙소에서 묵었는데 식비는 25만원이 나왔어요. 이게 말이 되나요?” 성종은 이렇게 투덜거렸지만, 실은 태헌 덕에 맛있는 것 먹고 다녀 좋다는 표정이었다. 태헌은 자기 고집 다 받아주는 세 사람이 고맙다는 표정이었고.
남자끼리 여행하는 묘미
남자끼리 하는 여행의 묘미를 몇 가지만 꼽아 달라 청했다. 태헌이 말했다.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성종이 말했다. “꼼꼼히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돼요.” 인영이 말했다. “꾸미지 않아도 돼요. 아무 옷이나 입고 제대로 안 씻기도 하고.” 결국 다 같은 얘기 아닌가. 편하다는 것. 그때 동환이 말했다. “남자끼리 여행 가면 마음속에 담아 뒀던 고민이나 생각들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좋아요. 옛 추억을 꺼내 보기도 하고요.”
넷이서만 여행을 다니면 여자친구가 서운해 하지는 않는지도 궁금했다. 인영을 뺀 세 남자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한숨도 쉬었다. “다 헤어졌어요.” 1년 전만 해도 모두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 명만 여자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 중이라고. 그래도 여행 때문에 헤어진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란다. 인영은 여자친구를 두고 어떻게 그리 자주 여행을 다니는 걸까? “처음엔 여자친구가 서운해 하기도 했고, 남자끼리 다닌다니까 괜한 의심도 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들과 한 번 밥을 먹고 난 뒤로는 순박한 친구들이라는 걸 알고 걱정을 안 하더라고요.” 서운함을 달래는 비결은 여자친구의 마음을 읽는 선물 센스다. “여행 다녀올 때마다 선물을 많이 사 와요. 최근에는 LA에서 에어비앤비 가이드북에 나온 마크제이콥스 디자이너 부티크를 찾아가 귀걸이를 한 쌍 사 왔는데 정말 좋아했어요. 인스타그램에서 본 거라고, 센스 있다고 하면서요. 뿌듯했죠. 하하.” 성종이 덧붙였다. “선물도 선물이지만 인영이 여자친구가 이해심이 깊어요. 여행 중에는 일부러 신경 쓰지 말라고 연락도 잘 안 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이해심 깊은 여자친구 구합니다.”(웃음)
혼자보다 함께가 좋은 이유
혼술, 혼밥 등 혼자 즐기는 라이프 스타일이 유행처럼 자리한 요즘에도 꿋꿋이 함께하는 여행을 고집하는 남자들. 혼자보다 함께하는 여행이 좋은 이유는 뭘까? “함께 즐거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 넷이 다 사회에서 만났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친구는 아니었으니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 적었죠. 그런데 이렇게 여행을 많이 다니다 보니, 추억이 두터워지고 인연이 깊어져요. 아무리 바보 같은 여행이었더라도 계속 곱씹으며 이야기할 수 있고, 그러면서 웃을 수 있고. 그런 게 좋아요.”(태헌) “평소 고민에 대해 서로 상담하고, 답을 찾을 수도 있어요. 여행을 가서만 할 수 있는 깊은 이야기들이 있거든요.”(성종)
싸운 적은 한 번도 없느냐 물었다. 네 남자는 한 번도 없다 답했다. 1~2살 차이지만 나이가 모두 달라서 나름 위계질서가 있다고 이유를 들었지만,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닌 것 같았다. 어떤 것도 크게 싫어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즐길 줄 아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함께해서가 아니었을까.
네 사람의 다음 여행지는 어디일까. 태헌이 요즘 일본 가마쿠라에 새롭게 꽂혔다는 걸 보니 그곳이 될 확률이 가장 높아 보인다. “신주쿠에서 전철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시골 마을인데, 되게 좋아요!”(태헌) “저 얘기를 요즘 맨날 해요!”(인영, 동환, 성종)
글 고서령 기자 사진 Travie photographer 고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