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반복이 지겨워져 여행을 떠난다지만,
도착 즉시 다시 그곳의 루틴이 시작된다.
조식부터 그렇다.
조식당 가는 길
늘 그렇듯 여행의 하루는 호텔 조식으로 시작한다. 여차하면 조식 뷔페 마감으로 손가락만 빨게 된다. 그래서 꼭 알람을 맞추고 잔다. 시차 적응에 실패하면 몸이 말려 놓은 시래기 같아진다. 하지만 아침식사에 대한 열망은 내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보통 둘째 날부터 ‘호텔 조식 룩’이 사라진다. 나가 보면 다들 그렇다. 양말을 아끼느라 맨발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식당으로 향한다.
내 경험에 따르면 아침에 타는 엘리베이터는 높은 확률로 모든 층에 선다. 게다가 문이 열릴 때마다 외국인이 탄다(아, 외국이었지?). 비좁은 엘리베이터는 금세 꽉 찬다. 벌써 허용 중량을 초과했을 게 분명하다. 유럽인들에겐 허용 중량이란 것도 굉장히 보수적이다. 어린이 시설도 아니고 대체 왜 11인이 700kg이란 말인가(미국에선 보통 1인당 100파운드, 즉 90.7kg으로 계산한다). 나는 8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때부터 이미 700kg은 충분히 넘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동글동글한 수건을 두른 인도인이 가방을 2개나 들고 탔지만,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물리학의 법칙(중력가속도)을 배신하고 엘리베이터는 정말 천천히 내려간다. 한증막 속의 모래시계처럼 시간이 더디 흐른다.
보통 호텔 체크인을 할 때 조식시간이 언제까지며 식당이 어딘지 알려 준다. 사실 어젯밤에도 그랬다. 프런트에 앉아 있던 눈이 회색인 ‘산드라(올리비아였나?)’는 쪽지에 또박또박 펜으로 정보를 적어 줬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내가 버렸겠지만. 어쩔 수 없이 다른 이들이 눌러 놓은 층에서 내리면 되겠거니 했지만, 커다란 짐을 보니 모두 로비에 체크아웃하러 가는 모양이다.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었다. 검실검실 떠오른다, 2F.
2층을 선택했다. 남현희(전 국가대표 플뢰레 펜싱선수)처럼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2층 버튼을 향해 손가락을 날렸다. 엘리베이터 2층 문이 열렸다. 칠흑같이 어두컴컴한 복도가 보였다.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탔던 동승객들은 더 큰 한숨을 쉬었다.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한숨으로 가득 차, 마치 열기구처럼 떠오를 것만 같았다.
‘아니 B1이었나?’ 지하를 둘러봤지만 조식당은 정작 1층 로비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식당으로 입장하려다가 눈이 회색인 남자에게 제지당했다. 요즘 객실 키에는 호수가 적혀 있지 않다. ‘LEE’라고 몇 번 외쳤지만 회색 눈동자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급한 김에 “저 안에 일행이 있어요, 저기 서 있는 저 사람이요!”라고 외쳤고(우리말로 한 것 같다) 그가 식당 안쪽에서 아는 척하는 바람에 겨우 입장할 수 있었다.
객실과 성을 말하면 곧장 입장이 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일본처럼 매번 식권을 내야 하는 곳도 있다. 조식권은 가장 얇고 값싼 색지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이는 과학자와 행동심리학자에 의해 가장 잃어버리기 쉽도록 고안됐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 객실까지 올라가서 여권을 들고 프런트로 내려갔다 와야 한다. 여행의 아침식사는 보통 이 루틴을 한 번쯤 경험하게 된다.
아시아의 조식이란
마닐라호텔이나 홋카이도 호시노야, 오이타 스기노이 등 이름난 몇 곳을 제외하곤, 대부분 호텔 조식은 보잘것없기 마련이다. “이게 다야?” 특히 유럽 호텔들이 그렇다. 반드시 부스러기를 흘리도록 마르게 구운 빵 몇 개와 많이 집어갈 수 없게 소금에 잔뜩 절여 놓은 훈제연어와 치즈, 메마른 오이 정도만 있을 뿐이고 거기다 커피와 차, 우유, 사과주스 정도가 놓여 있다.
“이봐, 하루 전에 미리 뜯어 놓으라 했잖아!” 호통치는 셰프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린다. 언제나 어제 개봉한 게 분명한 눅눅한 시리얼은 유럽의 유수 호텔들이 가진 대표적 루틴이다. 실수로(?) 바삭한 것을 먹인다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하다.
커피를 향 대신 온도와 용량으로 평가하는 내게, 뜨거운 커피밖에 없는 유럽 호텔의 아침식사란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멀쩡한 커피에 투게더 같은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얹어 오지 않나, 작은 커피잔에 달랑 얼음 하나를 띄워 체온과 비슷한 온도를 만들지 않나. 그도 아니라면 위스키 700ml는 족히 마실 만큼 커다란 아이스버킷과 지거(위스키 계량컵)를 가져오며 13유로가 적힌 청구서를 함께 내밀지 않나. 한 번은 새벽 댓바람부터 “커피 위드 아이스…, 크레이지 아시안….”이란 중얼거림까지 듣고 말았다.
‘에그 컵 스탠드’란 매우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만든 것 같다. 달걀을 까먹을 때 굉장히 유용하다. 티스푼으로 파먹을 때도 좋다. 문제는 ‘왜 달걀을 삶고 바로 찬물에 넣어 식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껍질과 함께 흰자를 3mm씩 벗겨내면 결국 난 노른자만 파먹게 될 터이고 그건 든든한 단백질 보충이 아닌 콜레스테롤 보충에 지나지 않는 행위인 것 아닌가.
프랑스의 농가민박인 지트(Gite)에선 전혀 얼굴을 붉힐 일이 없었다. 조식으로 빵과 우유, 커피만 줬기 때문이다. 다만 수십 종의 수제 잼이 굉장히 맛이 좋아 눈물을 글썽였더랬다.
아시아권 조식이란 얼마나 훌륭한가.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호텔에는 수많은 종류의 자국과 타국의 국수를 즉석에서 끓여 주는 라이브 스테이션이 있고 오믈렛이나 달걀 프라이를 취향껏 골라 먹을 수도 있다. 얌차(飮茶) 문화가 있는 홍콩은 최고다. 조식에서도 국수와 죽 종류를 마음대로 골라 먹을 수 있고 문을 나서면 맛 좋은 아침식사가 쫙 깔렸다. 생선구이와 국, 쌀밥, 김, 낫토를 주는 일본도 다양한 메뉴를 얼마든지 가져다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아이스커피까지 있다. 한류의 영향으로 김치도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
3천원 라면 정식
여행 중 조식을 포기하고 사 먹으면 하루가 순조로울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틀린 생각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비용과 노력을 요구한다. 런던 세인트 파크라스역에서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주문하기란 얼마나 고되고 당혹스러운 일인지, 거의 국내에서 공인인증서를 만들 때만큼 힘들다. 파마산 오레가노빵에 아보카도와 치즈, 할라피뇨를 추가하고, 핫칠리와 홀스래디시 소스를….
미국의 조식은 그리 나쁘지 않다.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는 열량과 브릭스(Brix)에 후하기로 정평이 나 있지 않던가. 가짓수는 아시아에 비해 적지만 그 면면이 풍성하다. 게다가 모두 팔뚝이 굵고 힘이 좋은 모양이다. 팬케이크 12장에 누텔라와 생크림을 100ml 뿌리고 거기다 씨겨자를 바른 소시지로 수북한 접시, 여기다 오징어 몸통만 한 치즈케이크와 스타벅스 원두를 썼다는 아이스커피에 시럽까지 부은 것을 단 1장의 트레이로 나를 수 있다. 그렇게 받은 트레이를 보고 있자면 이걸 먹고 당장 동면에 든다 해도, 2023년 봄쯤 깨어나 멀쩡히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사실, 괜한 트집이다. 이른 아침 회사 뒤 식당에서 3,000원짜리 라면 정식을 먹으며 해보는 푸념이다. 자가격리 해제로 여행이 시작되었다지만 아직은 상황이 녹록하지 않아 그냥 회사만 뱅뱅 돌고 있어 몽니가 돋아난 모양이다. 그냥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은 패스트푸드라도 조식 뷔페 좀 가보고 싶다. 눅눅한 시리얼에 미지근한 커피라도 좋고 무너진 팬케이크에 깔려 죽는대도 여한이 없을 테니 말이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