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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Jul 15. 2022

초비역세권자의 꿈

나는 지금 기차에 앉아 있다.
이번 달 8번째, 이번 주만 4번째다. 
<은하철도 999>의 철이처럼 
매일 기차에 앉아 있는 셈이다. 



낭만적인 이름, 기차


난 기차를 좋아한다. 모든 탈것 중에 으뜸이다. 낭만적이라는 배와 가장 빠른 운송수단인 비행기에 비해서도 그렇다. 기차는 적당히 낭만이 있고 빠르다. 기차는 역과 역을 잇지만, 대부분(새로 생긴 역은 멀다)의 역은 도심 한복판에 있다. 결과적으로 어떠한 교통수단보다 가장 최종 목적지에 가깝게 여행객을 데려다 주는 수단이 기차다. 물론 영종 신도시에 사는 사람에겐 조금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인류가 발명한 많은 것들이 잠깐 유행하다 곧 사라져 갔지만, 기차(1804)는 오히려 200년 세월이 넘도록 진화하고 발전하는 중이다. 연료는 바뀌었지만, 궤도 위를 달리는 원리는 여전하다. 날씨에 휘둘리지 않고 교통 체증이 없는 기차는 여전히 멋진 교통수단으로 사랑받는다.

기차(汽車)란 원래 수증기(汽)를 뿜어내는 기관차가 끄는 줄줄이(列) 궤도 차량을 이르는 말이다. 전기나 디젤을 쓰는 것은 따로 열차(列車)라 불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할 때는 ‘기차여행’이라고 한다. 열차역 대신 기차역이다. 기차가 열차보다 좀 더 서정적이며 낭만적인 느낌이라 그렇다.



무장열차 썰


여행지에서 기차를 타는 것을 즐긴다. 아예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면 더 좋다. 여행하며 많은 기차를 타 봤다. 

푸른 초원 너머 삐죽하게 솟은 만년설. 달력 같은 풍경이 차창에 펼쳐지는 ‘스위스 빙하특급(Glacier Express)’은 정말이지 근사했다. 마터호른이 있는 체르마트에서부터 눈부신 풍광 속을 꿰뚫고 다니며 나를 생모리츠까지 데려다 줬다. 높은 산 깊은 계곡을 건너는 다리와 극장처럼 순간 어두워졌다 갑자기 환한 빛이 들며 원색의 알프스 대자연을 보여 주는 터널 등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

호화열차 ‘블루트레인’은 또 어떠한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초원을 달리는 이 푸른색의 ‘레일 위의 호텔’은 비싼 티켓값을 톡톡히 한다. 케이프타운을 출발해 프리토리아까지 1,600km를 운행한다. 하루와 반나절이 걸리는 일정은 철저한 럭셔리로 채워진다. 전용역에서 체크인과 체크아웃이 이뤄진다. 일단 승객보다 더 많은 승무원이 탑승하며 남아공의 심각한 치안 사정을 고려해 용병도 함께 여행하는 ‘무장열차(armed train)’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또 살벌한 분위기는 아니다. 열차 안에는 바(bar)가 차려진 전망칸이 있고 다이닝 칸도 있다. 정장과 넥타이를 매지 않으면 다이닝 칸에 출입할 수 없다(이땐 늘 웃던 승무원이 잠깐 단호해진다). 언제든 제공되는 식사는 특급요리사가 최고급 로컬 식재료를 활용해 차려 낸다. 치킨 대신 타조 고기를 주는 것도 신기하다. 

모든 객차는 스위트룸이며 근사한 침구와 어메니티로 채워 놓았다. 심지어 쇼핑 칸에서는 다이아몬드를 판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진 않았지만. 3면이 전망 통유리로 이뤄진 열차의 꽁무니 전망 칸에서 와인, 위스키 같은 술이 무제한 제공된다. 취객이 나타난다면 용병 승무원이 통제하니 안심(?)이다.

같은 구간과 라인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모양의 ‘로보스 레일(Rovos Rail)’도 있다. 하차할 때가 되어야 겨우 이름을 외울 수 있는 ‘하이럼 빙햄(Hiram Bingham)’도 탔다. 페루 쿠스코에서 승차해 마추픽추(Machu Picchu)에서 하차하는 특급열차다. ‘특급’이라 해서 빨리 달리진 않는다. 절벽과 숲을 뚫고 달리는 하이…(무슨 햄이더라?) 아무튼 그 기차는 식사까지 제공되는 값비싼 기차다. 전망 칸에 앉아 아픈 머리(고산증)를 감싸며 흐릿한 풍경을 감상하다 보면 마추픽추에 도착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철도 중 하나인 노르웨이 ‘플롬 산악열차(The Flam Railway)’에 대한 기억도 매우 좋다. 작은 인간을 단숨에 압도하는 노르웨이의 웅장한 자연 속을 달리는 철도다. 세상에서 가장 긴 송네 피오르(Sognefjord)를 여행하기 위해 피오르 속 작은 마을 플롬(Flam)으로 향하려면 이 기차를 타야 한다. 온통 수직 절벽의 산악을 뚫고 놓은 구불구불한 철도에 오르면 신계와 같은 비경이 펼쳐진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 앞에 잠시 정차하는 서비스도 돋보인다.


KTX and SRT


아시아의 기차도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다. 중국 상하이 홍차오 공항의 자기부상열차는 ‘생산국 표시’의 불안감과는 달리 아주 매끈하게 달려 감탄을 자아냈다. 

일본에선 우주선 모양의 신칸센의 외형이 강한 임팩트를 주며, 내부의 흡연 칸은 깊은 감동까지 선사했다. 각 지역의 에키벤(驛弁)은 기차 여행자만 즐길 수 있는 특별한 재미로 남았다. 특히 아키타에서 니가타로 향하는 해안철도는 설국이란 별칭에 무척 어울리게 폭설로 칠갑을 하고 설국열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탑승객들을 즐겁게 했다.

내 기차여행 리스트에는 9,297km의 대장정 시베리아 횡단철도 ‘TSR(The Trans-Siberian Railway)’의 일부 구간도 있지만, 그놈의 전쟁 탓에 아예 생략하기로 한다.

스코틀랜드 왕립 호화열차 ‘로열 스코츠만’과 아프리카 11개국을 돌아다니는 ‘프라이드 오브 아프리카’, 런던에서 베니스까지 잇는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인도에서 유일하게(?) 내 좌석을 점령당하지 않고 여행할 수 있는 ‘로열 라자스탄 궁전열차’, 스페인의 ‘엘 트란스칸타브리코(El Transcantabrico)’, 캐나다 ‘로키 산악열차(Rocky Mountaineer)’, 싱가포르에서 방콕까지 연결한 ‘더 이스턴 앤드 오리엔탈 익스프레스’ 등은 아직까지 위시리스트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아, 저렴하지만 ‘싱마타이(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 열차’를 타 보긴 했다. 

아무튼, 덜컹거리는 심장박동과도 같은 기차 주행으로 즐기는 여행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이고를 잇는 ‘샌샌 캘리포니아 고속철’, 베이징에서 홍콩까지 연결된다는 중국 ‘징강(京港) 고속철’에도 어서 빨리 오르고 싶다. 비록 초비역세권(Ultra Non-station District)에 사는 처지지만, 언젠가 기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해 달리는 그날을 KTX와 SRT을 번갈아 타며 고대하고 있다.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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