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 소장이 전하는 잔혹동화.
여행자의 낭만, 그리고 허상에 대하여.
"세상에는 우리가 머릿속에 품고 지냈던 상상과는 터무니없이 다른 곳이 많다.
현실적 여행을 위해 전두엽을 좀 더 차갑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여행은 흔히 꿈과 낭만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말한다. 일견 그렇다. ‘원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란 단어를 쓰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자신이 기대하는 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 실재하는 세상을 보여 주겠다. 하하하.
만화영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배경으로 등장한 스위스(정확히는 스위스 그라우뷘덴주 마이엔펠트). 나는 반평생 하이디가 뛰어놀던 푸른 언덕의 목가적 풍경을 가슴에 묻어 두고 세탁기처럼 일만 하고 살다가 어느덧 30년이 지나 ‘알름 할아버지’의 또래가 된 후에서야 그 추억을 찾아 훌쩍 떠났다(늙은 몸을 이끌고 막상 스위스에 살고 있을 하이디를 찾아갔다 치자).
스위스의 여름엔 어딜 가나 어스름한 쇠똥 냄새에 시달려야 하고 겨울엔 철로를 제외한 모든 길이 막힌다. 게다가 무엇을 사거나 먹더라도 그 맛보다는 계산서에 적힌 숫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게 된다. 단 사흘만 지나면 고아인 하이디는 물론, 꽤 부유한 ‘클라라’도 사 먹지 못할 게 분명한 13.7프랑(1만9,000원) 빅맥세트가 그나마 최소한의 지출임을 깨닫게 된다. 알프스의 물가야말로 하이(High)디? 아무튼 하이디를 만나는 대가는 그만큼 컸다. 물 한 병에 5,000원이라니. 가난한 하이디는 아마도 그 푸른 초원에서 낙타처럼 살았을 게 틀림없다. 어쨌거나 1970년대 후반부터 방영한 이 만화영화의 아름다운 구도와 색채는 수많은 중늙은이 팬들을 그 휑하고 비싼 동네로 꾸준히 보내고 있다.
‘라팜팜 라팜팜’ 경쾌한 멜로디의 <플랜더스의 개> 역시 마찬가지 구도다. 벨기에 북부 플란데런 지방(현재 안트베르펀) 호보컨(Hoboken)이 배경인 영국 작가 ‘위다’의 소설. 이 작품을 만화로 봤던 다수의 한국인들은 우유 달구지를 끌고 새벽 언덕을 오르는 ‘네로(사실은 넬로)’와 ‘파트라슈(파트라셰)’의 모습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곳은 정작 지금의 ‘앤트워프’로 무려 50만명 이상이 모여 사는 대도시다. 서유럽에서
50만명(인근까지 120만명)이 몰려 산다면, 서정적 그리고 목가적 풍광이란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끔찍한 이 스토리의 끝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네로와 함께 살았던 미셸 할아버지는 크리스마스를 코앞에 두고 먼저 죽었고, 국내 모 유업처럼 갑질을 했을 리도 만무한데 우유 가게는 망했다. 네로는 ‘아로아(Alois)’의 아버지 ‘코제츠’씨 탓에 여친과도 헤어지고 나중엔 풍차 방화범으로 몰리기까지 했다. 집에서도 쫓겨난 네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콩쿠르에 그림을 냈으나 똑 떨어졌다. 다음날 성당에 들어가 그토록 원하던 루벤스 그림을 보며 쓰러져 죽었다. 파트라슈도 함께 죽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날. 연말 발인까지 아무 문상객도 찾아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전여친 ‘아로아’마저도.
초등학교 음악 실기시험에 곧잘 나온 독일 민요(?) ‘로렐라이’, 필자는 실제 계명으로 외워서 부르기도 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여기가 대체 어디길래, 나는 그 나라 사람들도 잘 모를 그 노래를 가사부터 계이름까지 달달 외웠어야 했나 싶지만, 저절로 한 번 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요정의 바위’란 뜻의 ‘로렐라이(Lorelei)’는 독일 장크트고아르스하우젠 부근을 흐르는 강가에 솟은 절벽 바위산(132m)이다. 팔츠그레펜슈타인성에서 약 10분 정도 내려가면 나온다. 일단 먼저 말해 두자면 풍경은 우리 화순 적벽이나 단양 사인암, 구례 사성암보다 못하다. 어느 절벽처럼 전설이 서려 있긴 하지만 옹색하다. ‘저녁에 석양이 들 무렵 인어가 바위 위에 올라와 머리를 빗으며 노래를 부르면 뱃사공들이 이에 현혹되어 절벽에 부딪혀 침몰했다’라는 내용이다. 하하하. 로렐라이는 원래 일본 음악 교과서에 먼저 노래가 실린 모양인데, 그래서 일본인 여행객들이 줄을 이어 ‘로-레라이(ロ-レライ)’를 찾았다고 한다. 히로히토 일왕도 1960년대 독일 순방 중 꼭 가 보고 싶다며 ‘로-레라이’를 다녀오고선 ‘상상하는 게 나았다’라고 술회했단다. 팬데믹 이전에는 중국인 관광객도 따라 러우렐리(洛雷利)로 ‘순례’를 떠났다고 한다. 그 옛날 독일 뱃사공을 현혹했던 인어가 근래에 와서 한중일 동양인 관광객을 매일 유혹해 침몰시키고 있는 셈이다.
덴마크 인어공주 동상, 벨기에 오줌 싸는 소년 동상, 그리고 로렐라이 언덕이 유럽 3대 실망스러운 관광지로 꼽히고 있다.
“왓슨, 베이커가 221B로 와 주게.” 소설에서 들었던 근사한 멘트. 전화가 아닌 전갈이다. 2층 사람의 불평에도 늘 파이프를 물고 있었을 ‘셜록 홈즈’가 살던 흡연 하숙방(?)이 바로 이 주소다. 이 역시 런던에 가면 어렵잖게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 다녀왔을 때까진 그랬다. 사실 알고 지내던 A씨에게 사기당했던 2,200만원 등 의뢰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막상 그 탐정의 집 문 앞에 접근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홈즈의 집 두꺼운 나무문 앞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중국인 왓슨(沃特森, 워터선) 단체와 꼬마 의뢰인들이 하루 종일 진을 치고 있다. 조그만 창으로 홈즈가 빼꼼히 내다볼 것 같은 상상력만 버린다면 여긴 그냥 집에 불과하다.
영국엔 호기심을 자극하는 명소가 또 있다. 외근직 요원 007 제임스 본드가 가끔 출근하는 기관 ‘MI6’의 본사다. 비밀정보기관(Secret Intelligence Service)인데 택시를 타고 가자면 바로 앞에 내려 준다. 런던 시민 누구나 이 건물에 무슨 기관이 입주해 있는지 알고 있다. 차를 타고 템스강 강변북로(?)를 달리다 보면 서쪽 강둑에 당당히 서 있는 녹색 건물이다. 눈에 익은 모습 그대로다. 이게 무슨 비밀정보기관이란 말인가. 원래 낡은 폐공장 지하나 사막토굴 속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검문 한 번 받지 않아 실망감이 앞선다. ‘빅토리아 시크릿’이 절대 비밀스럽지 않은 것처럼 MI6 역시 지극히 퍼블릭하다. 덕분에 007시리즈 <스카이폴>에서 테러 습격을 받았고, <스펙터> 편에선 아예 폭파되어 버린다(물론 극중 설정이고 완벽한 방호 태세를 자랑한다고 한다).
이처럼 실제 세상에는 우리가 머릿속에 품고 지냈던 상상과는 터무니없이 다른 곳이 많다. 여행에 너무 진한 감상을 바른다면 실망할 게 분명하다. 요즘은 실시간 정보도 많으니 현실적 여행을 위해 전두엽을 좀 더 차갑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 막상 실제론 그리 못하는 게 나 자신이지만서도.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