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는다는 건 행위를 넘어선 경험이다.
여행은 경험이다.
그러니 ‘음식=여행’이라는 공식은 맞다.
투박한 현지 음식 속에서,
우리의 여행 경험은 두터워진다.
세부에서 먹고 마시는 일
필리핀 제2의 도시, 세부(Cebu). ‘경기도 세부시’라고 불릴 만큼 한국인이 즐겨 찾는다. 6월 말, 막탄섬에 온 외국인은 거의 다 한국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부는 멋진 해변을 가진 휴양 도시로 우리에게 인식돼 있지만, 필리핀 안에서는 미각을 만족시키는 미식 도시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필리핀 그리고 세부의 음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잠깐 훑어봐야 한다. 1521년, 스페인 국왕의 후원을 받은 포르투갈 항해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부에 상륙했다. 세부에 다양한 문화가 스며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젤란 이후 스페인은 300년간 필리핀을 통치했으며, 19세기 말부터는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했다. 태국이나 중국 푸젠, 광둥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이 몇 년간 통치한 적도 있다. 세부에 다채로운 식문화가 꽃핀 것은 당연한 일.
세부라는 이름 자체가 무역을 뜻하는 세부어 ‘sibu’에서 비롯됐을 만큼 세부는 오랫동안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다. 각국에서 다채로운 식재료가 들어왔고, 관광 도시가 되자 요리사들도 몰려들었다. 다양한 입맛을 맞추기 위한 새로운 시도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전통 음식뿐 아니라 퓨전 요리가 세부에 유독 발달하게 된 배경이다.
세부에선 필리피노라는 말 대신 ‘세부아노(Cebunao)’를 더 자주 들었다. 세부인 혹은 세부어를 뜻하는 ‘세부아노’에는 세부 사람들의 자부심이 반영돼 있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 처음 알았다. 디너 파티에서 성악가는 영어도, 타갈로그어도 아닌 세부어로 노래를 불렀다. “노랫말을 이해하시나요?” 고개를 끄덕이면 세부아노, 고개를 저으면 그냥 필리피노였다. 지구상 어느 지역이 자부심을 갖고 있지 않겠냐마는, 세부는 유난스러울 정도였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은 6월에 열린 ‘세부 푸드 앤 와인 페스티벌(CFWF) 2023’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세부의 전통 음식과 미식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호텔, 리조트, 레스토랑이 한데 모인 행사였다.
겉바속촉 돼지 통구이
레촌 Lechon
세부 사람들은 ‘레촌(Lechon)을 먹어 보지 않았다면 세부에 오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할 정도로 레촌을 세부 대표 음식으로 꼽는다. 레촌은 ‘젖 먹는 아기 돼지’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레촌(Lechon)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아기 돼지를 통으로 굽는, 다소 기이한 모습도 목격된다.
돼지를 통으로 구운 요리인 레촌은 필리핀의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세부만의 특별한 레시피가 있다. 레몬그라스, 타마린드, 부추, 마늘, 양파, 흑후추처럼 향이 강한 재료를 속에 가득 채운 후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천천히 오래 굽는다. 특히 적갈색의 껍질은 우리의 족발 껍질과 비슷하지만 훨씬 바삭바삭해서 젓가락을 자꾸 부른다. 레촌은 결혼식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중요한 행사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세부인들에게 중요한 음식이다.
마르코 폴로 플라자 세부
Nivel Hills, Cebu Veterans Dr, Cebu City, 6000 Cebu, 필리핀
레촌 말고도 세부 전통 음식을 맛보고 싶다면, 마르코폴로 호텔 1층의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세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전망이 좋을 뿐더러 돼지껍질을 튀겨 만든 치카론(Chicharon), 말린 생선을 튀기거나 구워 낸 당깃(Danggit) 같은 세부 전통 음식을 두루 맛볼 수 있다.
작지만 강한 매력
롱가니사 Longganisa
우선 산미구엘을 한 병 준비하자. 한입에 쏙 들어가는 사이즈의 이 소시지는 시원한 맥주를 부른다. 세부 길거리에서 연기를 폴폴 내며 구워지는 소시지를 봤다면, 이게 바로 롱가니사(Longganisa)다. 스페인에서 시작된 소시지로, 스페인이 지배했던 나라마다 재료와 맛이 다르게 발전했다.
필리핀의 롱가니사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를 다져 후추, 마늘 등 향신료를 넣어 만든다. 특히 세부의 롱가니사는 훈제 향이 강하고 더 달콤하며 톡 쏘는 매운맛이 도드라진다. 매우 중독성이 있는 맛이다. 필리피노는 롱가니사를 계란 요리와 함께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다.
보라빛 달콤함
할로할로 Halo-halo
우리나라에 팥빙수가 있다면 필리핀엔 할로-할로(Halo-halo)가 있다. 따갈로그어로 ‘할로(Halo)’는 ‘섞다(mix)’라는 뜻. 한국의 빙수처럼 곱게 간 얼음 위에 코코넛, 타피오카, 망고, 바나나, 연유, 견과류, 레체플란(푸딩) 등 필리핀 식재료를 다양하게 얹는다.
가장 중요한 재료는 뭐니 뭐니 해도 보라색의 우베 아이스크림이다. 색이 너무 선명해서 인공색소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필리핀을 원산지로 하는 넝쿨식물의 뿌리인 우베(Ube, Purple yam)로 만든다. 자색 고구마와 비슷한 우베는 필리피노들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식재료로, 아이스크림이나 푸딩, 케이크, 떡 등의 재료로 쓰인다.
“비벼 비벼!”는 그냥 “할로 할로(Mix Mix)!”라고 말하면 된다.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먹으면 정수리까지 시원한 맛이 치솟는다. 할로할로는 어디서나 손쉽게 맛볼 수 있다. 노점상은 물론 패스트푸드 체인점, 고급 레스토랑에서도 빠지지 않고 판매하니 무더위에 지쳤을 무렵, 이 보라색 빙수를 꼭 맛보자.
세 가지 조화
버드버드-망가-식와테
Budbud-manga-sikwate
망고는 필리핀의 축복이다. 망고가 더욱 싱싱하고 당도가 높은 기간은 3월에서 6월까지. 망고 철에 필리핀을 방문한다면 과즙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망고를 맛볼 수 있다. 운이 좋다면(이번에 정말로 그랬다) 리조트 조식 뷔페에서 산처럼 쌓인 망고를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는 행운도 따른다.
세부는 세부 망고라는 브랜드가 따로 있을 정도로 망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가 쉽게 ‘망고 밥’이라고 일컫는 버드버드-망가-식와테(Budbud-manga-sikwate)는 말 그대로 밥-망고-초콜릿을 뜻한다. 버드버드는 찹쌀에 코코넛밀크를 섞어 찐 것으로 떡에 가깝다. 코코넛 떡의 고소한 맛과 쫄깃한 식감은 한국인 입맛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잘 익은 망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초콜릿인 식와테를 곁들인다. 이상해 보여도 몇 번 먹다 보면 달콤함에 중독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필리핀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아시아 초콜릿 생산 2위 국가다. 2021년 다바오 지역을 필리핀의 초콜릿 수도로 지정하는 법이 제정됐을 만큼 카카오 생산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다. 떡과 망고, 초콜릿의 조화는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필리피노들은 아침 식사로 즐겨 먹는 메뉴다. 높은 탄수화물과 당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생성하기 때문에 무더위를 이겨 내고 노동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다. 당연히 기분도 좋아진다.
조금은 사치스럽게, 특별한 식사 한 끼
로컬 냄새 풀풀 나는 현지 음식을 맛봤다면, 맛을 음미하고 멋을 감상하는, 약간은 사치스러운 한 끼는 어떨까? 세부의 재료로 모던하게 재해석한 지중해풍 음식, 인접한 나라에서 온 진짜 태국 요리, 세부 해변에서 맛보는 나폴리 요리…. 세부는 다양한 미식의 세계를 보여 준다. 어떤 레스토랑이 진짜인지 잘 모르겠다면, 셰프의 경력을 참고하면 실패하지 않는다. 전 세계 미쉐린 레스토랑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유명 셰프들이 이끄는 레스토랑을 소개한다. 세부 미각 여행을 더욱 다채롭게 해 줄 그런 곳들이다.
특별한 날을 위한
안자니 Anzani
세부 시내 한가운데는 꽤 가파른 언덕이 있다. 네빌 힐즈를 오르다 보면 부부인 마르코(Marco)와 케이트(Kate)가 운영하는 안자니(Anzani) 레스토랑이 있다. 여긴 택시들도 다 안다.
안자니는 16살 때부터 스페인, 그리스 등 18개국 총 30개 도시에서 요리 경력을 쌓았다. 폴 보퀴즈와 알랭 뒤카세와 같은 전설적인 셰프들로부터 요리를 전수 받으며, 이스탄불에서 미쉐린 스타를 받은 후 세부에 자리를 잡았다. 레스토랑의 마케팅을 총괄하는 케이트는 세부에서 알아주는 요식업 사업가다. 이번 세부 푸드 앤 와인 페스티벌의 회장으로 활동하며, ‘세부 푸드 공동체’를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안자니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마치 아늑한 유럽의 오두막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식당은 몇 개의 구역으로 구분돼 있다. 1층은 메인 식당이며, 아래층엔 소규모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와인 셀러가 있고, 발코니로 되어 있는 야외엔 알 프레스코 바가 있다. 발코니에 기대서면 안개 속에서 난초가 피어 있는 몽환적인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다.
안자니는 지중해풍의 세부 퀴진을 내세운다. 파스타, 리소토, 피자, 해산물, 육류 요리 등 다양한 메뉴가 있다. 지중해의 맛을 내기 위해 올리브, 굴, 토마토, 레몬, 허브, 치즈를 다채롭게 쓰는 것이 특징이다. 음식은 하나하나 예술품 같아 포크를 들기 전에 카메라부터 들게 된다.
안자니는 모든 빵을 직접 굽는다. 작은 토분처럼 생긴 빵틀에 구워진 빵은 뜨끈뜨끈한 상태로 나온다. 갓 구운 빵은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함께 나오는 그리스 전통 소스인 차지키나 중동지역 소스인 후무스와 곁들여 먹으면 빵만으로도 이 레스토랑의 실력을 가늠하게 된다.
Anzani New Mediterranean Restaurant
주소: Panorama Heights Nivel Hills, Cebu City, 6000 Cebu, Philippines
전화: +63 32 232 7375
세부의 선셋과 함께 타이 푸드
벤자롱 Benjarong
필리핀엔 많은 태국 음식점이 있지만, 제대로 맛을 내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태국의 고급 호텔 브랜드답게 두짓타니 막탄 리조트엔 수준급의 태국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이 있다. 벤자롱(Benjarong)에 들어서면 태국 특유의 환한 미소를 띤 직원들이 환영 인사를 건넨다. 벤자롱의 시그니처 식전주는 색깔이 점차 보라색으로 변한다. 시작부터 로맨틱한 기분이다.
오픈 키친을 통해 메뉴에 대한 신뢰도도 높였다. 태국 중부 프라친부리 출신의 셰프, 탄(Than)은 벤자롱의 모든 요리를 지휘한다. 팟 끄라 파오, 얌, 팟타이 그리고 그린 커리는 모두 탄의 고향에서 직접 배워 온 것. 기호에 따라 맵기도 조절해 준다. 타이 스파이시(Thai spicy) 단계가 가장 높지만, 한국인이라면 도전해 볼 수 있는 정도이며 태국 특유의 향과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두짓타니는 세부에서 유일하게 서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리조트다. 벤자롱에서 제대로 된 태국 요리를 맛보기 전에 잠깐 시간을 내어 스카이 가든에서 칵테일과 함께 마젤란만의 선셋을 감상하면 두짓타니의 저녁을 즐기는 완벽한 방법이 된다 .
Benjarong Mactan
주소: Second Level, Cebu Wing, Dusit Thani Mactan Cebu, Punta Engaño Road, Mactan Island, Lapu-Lapu City, Cebu, Philippines
전화: +63 32 888 1388
열대에서 맛보는 진짜 이탈리안 푸드
아쿠아 Acqua at Shangril-La Mactan
샹그릴라 막탄 리조트에 있는 아쿠아(Acqua)는 제대로 된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인도, 모리셔스, 네덜란드, 런던, 태국 등 미쉐린 스타 호텔과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수석 셰프 루카(Luca)는 나폴리 해변가에서 나고 자랐다. 그래서 샹그릴라를 선택했을까? 해변가에 있는 샹그릴라에서 루카는 고향의 맛을 그대로 재현해 낸다.
최근엔 코로나를 극복한 기념으로 나폴리를 넘어 이탈리아 전역의 맛을 보여 주겠다며 새로운 메뉴로 단장했다. 이탈리아 치즈 플래터, 카프레제 샐러드, 토마토만으로 맛을 낸 푸타네스카 파스타, 봉골레, 리소토 말고도 토스카나 스타일의 쇠고기 스테이크, 와규 스테이크, 양갈비 스테이크 등이 인기다.
제맛을 내는 피자 한 판, 사실 만나기 쉽지 않은 일이다. 시그니처 피자는 ‘프로슈토 디 파르마 피자’. 클래식 파르마 햄과 부라타 치즈, 모차렐라 치즈, 아르구알라(보통 로켓이라고 하는), 신선한 토마토소스와 바질이 어우러져 담백하면서 풍성한 맛이 난다. 물론 전통의 마르게리타 피자는 말할 것도 없다. 요령과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 낸 이탈리안 스테이크와 피자는 꼭 맛보길 추천한다. 와인을 잘 모르겠다면 셰프에게 모든 걸 맡기자. 이탈리아 와인과 완벽한 페어링, 마치 입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요리란 가족애와 행복감을 공유하는 확실한 매개체”라는 루카의 말처럼 가족 식사로 완벽하고, 로맨틱한 둘만의 식사로도 편안하다. 물론 깔끔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도 한몫한다. 레스토랑은 풀 사이드에 있어 낮이면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기분이 좋아지고, 밤이면 은은한 물빛과 별빛에 눈과 마음이 젖는다. 샹그릴라에 머무는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아쿠아 레스토랑 때문이었다. 같은 레스토랑을 두 번 오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결국 그렇게 되었다.
Acqua Gazebo at Shangri-La Mactan Resort and Spa
주소: Ocean Wing, Lapu-Lapu City, Cebu, Philippines
전화: +63 32 231 0288
글·사진 김진 에디터 곽서희 기자
취재협조 세부 푸드 앤 와인 페스티벌 www.cebufoodandwinefestiv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