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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Mar 22. 2017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도시
보스니아

이제는, 발칸
Bosnia-Herzegovina & Montenegro & Serbia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를 차례로 다녀왔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이었던 한 나라가 분리, 독립을 거쳐 세 나라가 되었다. 이 작은 나라들에 무엇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수없이 깃들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다 답하겠다. 복잡한 정치 상황, 슬픈 전쟁의 역사를 거쳐 지금은 제 빛을 담담하게 발하고 있는 세 나라에 대한 이야기다.




보스니아와 몬테네그로 접경 지역에 위치한 트리빈예의 밤 풍경


복잡다단 보스니아
Bosnia-Herzegovina

사람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를 두고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부른다. 고대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였기에 다양한 문화가 조랑조랑 한데 모였다. 로마 분열의 경계선이던 땅을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면서 가톨릭과 정교, 이슬람교가 공존하게 됐다. 


5~11세기는 로마제국, 이후 14세기까지 보스니아 왕국, 15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오스만투르크가 이 땅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19세기 말, 세력이 약해진 오스만투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 거듭났고, 수장이었던 티토의 사망으로 정세는 불안정해졌다.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계가 힘을 합쳐 분리, 독립을 시도했지만 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계는 내전을 일으켰다. 1991년의 일이다. 3년 8개월의 전쟁 끝에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라는 나라 이름을 얻었다. 


이름은 보스나(Bosna)강이 흐르는 보스니아 지역과 네레트바(Neretva)강이 흐르는 헤르체고비나 지역을 나란히 붙여 부르지만, 세르비아인이 주로 사는 스릅스카공화국(Republika Srpska)이 슬며시 숨어 1국가 2체제다. 보스니아 지역은 무슬림,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가톨릭, 스릅스카공화국은 정교를 믿는다. 종교가 문화의 기반이 되고 문화가 정치의 기반이 되는 탓에 나라를 통치하는 내각도 셋으로 갈려 각각의 의장이 8개월씩 돌아가면서 통치한다. 


한반도 25% 크기의 작은 나라가 이렇게 복잡해도 되나 싶지만, 여행자에게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나라는 매력적인 법. 내전 이전에는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살았단다. 다른 종교를 가진 세 친구가 카페에 함께 모여 즐겁게 지내다 각자의 기도 시간이 되면 차례로 기도하고 다시 돌아와 일상을 공유하는 식이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 모습을 지금의 여행자가 볼 수 있었다면 훨씬 아름다웠겠지. 

구름이 낮게 걸린 보스니아의 전원 풍경. 희망의 터널 앞이다
라틴 다리.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아프고 아름다운 이름,
사라예보 Sarajevo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의 공항에 내리자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기 시작했다. 길쭉한 구름이 산허리와 마을 지붕의 경계에 낮게 걸린 풍경은 사뭇 꿈같다. 덩치 큰 사람이 지붕에 올라앉으면 머리가 구름 안으로 숨어들 정도다. 풍경만큼 아름다운 지명이지만 역사는 이곳을 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자 20세기의 전쟁사를 마무리한 고통의 무대로 기록한다. 1914년, 밀야츠카(Miljacka)강을 가로지르는 라틴다리(Latin Bridge) 인근의 시청사 앞. 반 오스트리아 비밀결사 당원인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부를 사살한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 


시간이 흐르고 1991년, 다시 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세르비아계 민족은 사라예보를 둘러 솟은 네 개의 산에 진을 치고 도시를 포위, 공격했다. 인종청소라는 악명을 얻을 만큼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계 민간인을 상대로 한 학살과 강간이 빈번하게 자행됐다. 4년의 전쟁 동안 1만1,000여 명이 사망했고 이중 아이들이 2,000여 명이나 됐다. 고립된 사람들은 살길을 모색했다. 포위망을 가까스로 비켜간 산맥 아래 가정집, 그 지하에 길을 냈다. 음식, 구호물자, 무기들을 실어 나르고 일부는 탈출도 감행했다. 높이 1.6m 길이 800m, 어둡고 긴 희망의 터널은 전쟁이 종식되고 박물관의 모습을 갖췄다. 박물관 입구, 포탄을 맞은 울퉁불퉁한 지면을 붉게 칠했다. 사람들은 이를 ‘사라예보의 장미’라 부른다. 여행하는 내내 ‘사라예보의 장미’는 꽤 자주 보인다. 마주칠 때마다 아프고 두렵지만, 사람들은 다짐한다. ‘다시는 같은 고통을 겪지 않으리라.’

보스니아 바슈카르지아의 오후는 나른하고 여유롭다
바슈카르지아 한 켠에서 레이스를 떠 판매하는 할머니의 미소가 인자하다
카잔질록 골목의 한 상점에서 장인이 구리공예품을 만들고 있다
카잔질록 골목은 구릿빛으로 가득하다.
오스만투르크 점령기에 축조된 베지스탄의 내부




다양한 문화의 교집합,사라예보 구도심
바슈카르지아 Bascrjia


밀야츠카강 북쪽 구도심을 걷다 보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시대의 건축물과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 세르비아 정교회, 여러 개의 모스크가 차례로 보인다. 빠른 속도로 수백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듯하다. 사라예보가 오스만투르크 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도시인만큼, 이슬람의 정취가 가장 짙게 배어난다. 


구시가지 중심인 바슈카르지아를 찾았다. 작은 마을이던 이곳은 오스만투르크 점령 이후 국제도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바슈카르지아는 터키어로 중앙시장이라는 의미. 16세기 이후 발칸반도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모스크와 시계탑, 베지스탄(Bezistan·오스만 시대의 직물,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대형 쇼핑센터) 등 수많은 역사적 건축물들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과거에는 베지스탄의 유무로 도시의 등급을 분류했다고 하니, 두 개의 베지스탄을 가진 사라예보는 꽤 번성한 무역 거점이었을 게다. 아니나 다를까, 원래의 도시 규모는 현재의 두 배였는데 19세기 화재로 도시의 반이 잿더미가 됐단다. 


상점과 레스토랑이 도열한 골목 여기저기서 양고기 굽는 냄새, 터키식 커피, 물담배 향이 뒤엉켜 피어오른다. 물건을 사고파는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여 활기가 가득하다. 옛 시절, 수많은 골목에는 같은 종류의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모여 길드가 조성됐는데 화재와 전쟁, 현대화를 거치는 동안 하나둘 사라졌다. 지금은 카잔질룩(Kajandziluk) 골목만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았다. 터키어로 카잔은 냄비를 뜻한다. 구리로 만든 냄비와 그릇 제품들을 내놓은 골목은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카잔질룩 골목 인근에는 구시가지의 상징인 세빌리 샘이 있다. 이 물을 마시면 사라예보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믿고 싶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톨릭과 이슬람 두 문화를 연결하는 아름다운 모스타르 다리


이음의 미학,
스타리 모스타르 Stari Mostar


사라예보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서쪽으로 향했다. 디나르 알프스의 구불구불한 산맥 길을 2시간 남짓 이어 달리면 헤르체고비나 지방의 주도 모스타르에 닿는다. 모스타르라는 이름은 다리의 파수꾼을 지칭하는 모스타리(Mostari)에서 유래됐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 다리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구도심을 관통해 흐르는 네레트바강 위에 아름답게 놓인 다리 ‘스타리 모스타르(Stari Mostar)’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구시가지는 네레트바강을 중심으로 이슬람 지역과 가톨릭 지역으로 나뉜다. 자연히 다리는 사람뿐 아니라 두 문화를 잇는 평화와 화합의 상징이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랜드마크가 됐다. 1993년 내전으로 파괴됐던 다리는 2004년 복원을 거쳐 2005년, 구시가지와 더불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시가지로 향하는 길, 세 마리의 떠돌이 개가 시내에서부터 길을 안내하듯 동행했다. 마치 매일의 일상인 듯 개들의 몸짓은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구시가지에 들어서자 동행한 개 한 마리가 누군가 먹다 버린 고기 뼈를 찾아내 이슬람 전통 목욕탕인 하만(Haman) 앞에 누워 먹기 시작한다. 가죽장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냄새가 심해 그들만의 하만이 따로 있었다는 가이드의 말은 개에게 홀려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모스타르에서 가장 큰 모스크, 시계탑, 모스타르에서 가장 오래된 모스크를 지나 오래된 상점들이 모인 오래된 골목을 걸었다. 다리를 건너 가톨릭 지역의 옛 유대교 회당, 사제의 거주 지역, 로마시대의 바실리카 성당 등을 둘러본 후, 마침내 스타리 모스타르 아래 섰다.


네레트바강 위로 우아하게 놓인 다리는 아름답고 또 아름답다. 16세기 다리를 놓은 오스만투르크 사람들은 500년이 지난 후대에게 이토록 큰 감동을 주리라는 것을 알았을까? 스타리 모스타르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고기 뼈를 씹던 개는 어느덧 내 곁에 와 물장구를 친다. 갑자기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누군가가 다리 위에서 강을 향해 내리 꽂혔다. 풍덩! 짝짝짝짝! 순식간이었다. 21세기의 모스타리(다리의 파수꾼)를 자처하는 건장한 남자가 관광객들이 십시일반 걷은 25유로를 받고 다리에서 뛰어내렸다. 날씨도 추운데 고생이 많아 보인다. 그나 나나 개나 먹고 살기 녹록치 않다 싶었다. 녹록치 않은 삶들의 반대편에는 할아버지와 산책 나온 해맑은 어린이의 아름다운 한때가 강변의 비둘기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포치텔로 입성하는 작은 돌길 위에 노점상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았다
코니츠의 고즈넉한 골목 풍경
포치텔의 성에서 내려다보면 네레트바 강이 감싼 마을의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도시 둘,
코니츠 & 포치텔 Konjic & Pocitlj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중간 지점에 코니츠라는 도시가 있다. 사라예보에서 남서쪽으로 50km 떨어진 이곳은 4,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평온한 풍경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을 정도로 고즈넉하다. 단풍이 울긋불긋 물든 산허리에 모스크가 우뚝 솟아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나기도 한다. 


코니츠는 래프팅 명소다. 네레트바강의 북쪽 지류 라키트니차(Rakitnica) 계곡의 물살을 가르기 위해 여름마다 관광객이 몰려든단다. 래프팅이 어울리지 않는 추운 계절에 갔으니, 상상 속 스릴만 만끽했다. 대신 티토의 벙커(Titto’s Bunker)로 발길을 돌렸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곡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었지만, 아쉽게도 벙커까지 가는 길은 군사지역이라 촬영할 수 없단다.


가벼운 산책길의 끝 지점엔 작은 문이 하나 나 있다. 티토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지하세계. 들어가는 입구는 ‘은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허름하고 좁다. 핵 공격에 대비해 파 놓은 거대한 규모의 벙커지만, 티토가 죽기 바로 전인 1979년 완공된 탓에 정작 그는 한 번도 와 보지 못했단다.


벙커는 현재 아티스트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났다. 6,500m2에 빼곡하게 들어찬 100여 개의 사무실과 침실들이 예술을 위한 방이 된 셈이다. 공산주의 국가 특유의 간결하고 모던한 스타일의 집기들이 수두룩하고, 인근 동유럽 국가들의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이 가득 들어차 들러 볼 만하다.


포치텔은 모스타르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곳, 네레트바강 좌안에 위치한 성곽 마을이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원형 계단식 카르스트 지형인 탓에 마을 자체가 요새다. 보스니아 왕국의 사람들이 살던 곳을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한 이후 모스크, 하만, 이마렛, 학교 등을 추가로 세우면서 규모가 커졌다. 


기념품과 먹거리들을 파는 대여섯 개의 노점들을 지나면 마을로 이어지는 가파른 언덕길이 시작된다. 이 길을 따라 20분쯤 오르면 가장 높은 탑에 닿는다. 라푼첼의 성을 닮은 깊고 좁고 가파른 통로를 원형으로 돌아 올랐다. ‘아이고’와 거친 숨을 네댓 번 입 밖으로 토해내면 마지막 계단이 발아래 닿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과 산들 불어오는 바람은 정신을 몽롱하게 주무르는 듯하다. 돌 벽 사이로 난 여러 개의 큰 창을 통해 보이는 마을의 풍경은 흡사 갤러리에 걸린 여러 점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용기 내 창틀을 밟고 섰다. 발아래 펼쳐진 마을의 풍경이 아찔하다.




TRAVEL INFO

AIRLINE
발칸반도 여행을 할 땐 터키항공이 빠르고 편하다. 이스탄불공항에서 한 번 갈아타면 보스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 서울-이스탄불 구간은 주 11회 운항한다.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 하루 2회, 몬테네그로 하루 1회 운항한다. 이스탄불공항의 비즈니스 라운지에는 샤워실, 무료 인터넷, 주류를 포함한 식음료 등 기존 서비스에 더해 당구, 스크린 골프, 자동차 레일 게임 등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이것저것 누리다 보면 긴 대기 시간도 짧게 느껴지는 마법의 라운지다.  turkishairlines.com


CURRENCY & TIME
보스니아는 마르카(BAM)를 쓴다. 1마르카는 약 650원이다. 몬테네그로는 EU 가입국은 아니지만 유로(EUR)를 쓴다. 세르비아의 화폐는 디나르(RSD). 1디나르는 10원이다. 한화에서 ‘0’을 빼고 계산하면 편하다. 시차는 세 나라 모두 한국보다 8시간 느리다. 


FOOD
보스니아
구시가지 바슈카르지아 골목은 고기 굽는 연기로 가득하다. 양이나 소의 다양한 부위를 스테이크, 소시지, 완자 등으로 만들어 두고 주문하면 바로 구워 주는 식당들이 많다. 인기 메뉴는 체밥치치(Chebab Chichi)다. 다진 고기를 손가락 크기로 돌돌 말아 구워 먹는다. 납작한 빵에 소스를 바르고 샐러드를 넣어 싸 먹는 음식인 소문(Somun)도 맛이 일품이다. 주의할 점! 돼지고기는 무슬림이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금기다.



글·사진 Travie writer 문유선  에디터 고서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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