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하는 베짱이로 살아갈 테다.
추워도 괜찮다,
뜨거운 음악과 함께라면.
힘들면 어떤가,
취향대로 여행하련다.
개미와 베짱이의 첫 만남
12년 전, 어느 선술집. 두 친구가 술잔을 기울인다. 어머니와 함께 여행을 가야겠다며 이야기를 먼저 꺼내 놓는 사람은 훗날 <엄마, 일단 가고 봅시다>의 저자가 된 태원준이다. 경청하던 친구는 이내 펑펑 울어댄다.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 눈물을 훔치며 긴 머리를 다소곳이 틀어 올린 그. 5년이 지난 지금, 올해 초 발간한 <길 위에서 샤우팅! 노 뮤직 노 트래블>의 저자 에이칸의 이야기를 들어 볼 차례다.
에이칸_우리 사하라사막에서 막 벗고 뛰어놀았잖아.
태원준_그러니까, 진짜 재밌었는데. 근데 너만 벗었잖아(웃음).
사하라에서 싹 틔운 우정
에이칸과 태원준의 사이는 심상치 않았다. 첫인사를 무려 격한 포옹으로 시작하는 걸 보니 보통 사이가 아닐 터. 인터뷰 시작 전 꼭 물어야 했다. 둘의 인연은 수단에서 맺어졌단다. 2006년, 외교부가 진행했던 수단 교류프로그램에 참여한 그들의 공통 관심사는 역시나 여행이었다.
그들은 수단까지 간 김에 사막에 대한 로망 하나로 사하라 사막으로 향했다. ‘사하라’는 불모지를 뜻하는 아랍어 ‘사흐라(Sahra)’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불모지에서 비옥한 우정의 씨앗을 싹 틔운 셈. 헌데 잠자코 듣고 있자니, 두 사람의 여행 스타일이 전혀 반대다. 태원준은 이른 아침 일어나 모든 곳을 돌아보는 개미형 여행자인 반면, 에이칸은 느지막이 일어나 곧장 펍으로 향할 베짱이 여행자 스타일이랄까. 12년간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이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졌다.
태원준_에이칸, 그 이야기부터 해 봐. 에이칸 이름 이야기 있잖아!
에이칸_약간 재미있는 이야긴데, 사실 아프리칸African에서 가져온 이름이에요.
신현석 a.k.a Akan
그의 이름은 에이칸(Akan)이다. 국내산 이름은 아닐 테고, 문뜩 원산지가 궁금해 물었다. 세상에, 무려 아프리카란다. “아프리칸(African)이라는 단어에서 제 가슴 속에 있는 자유Free(Fri)를 빼고 에이칸(Acan)으로 지었어요.”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어쩌면 그가 외국인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본명은 ‘신현석’이다.
대학시절, 그는 아프리카어를 전공했다. 일찍이 기타를 들쳐 멨으니 전공이 무슨 의미겠는가. “Love & Peace”를 외쳐대었다. 록스타를 꿈꿨지만 곧 기타에 영민한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불쑥 아프리카로 떠났다. 다소 뜬금없는 상황 전개에 놀라 그를 말똥히 쳐다봤다. 더군다나 아프리카라니…. “보통 유럽, 일본 등 유명 국가들을 가고 싶어하잖아요, 이유 없이 막연하게. 저에게는 아프리카가 그런 곳이었어요. 막연히 가고 싶은 곳, 제3세계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없었죠.”
그는 3개월 동안 케냐에서 남아공까지, 아프리카 육로 종단을 마쳤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 졸업 후 은행원이 되었다. “아, 참고로 저 공부 못했어요. 최종학점이 3.2에 토익도 720점 정도? 무리에 꼭 한 명씩 있는 미운 오리새끼였죠. 헌데 저에게는 장점이 있었어요. 모두에게 궁금한 사람이었죠. 면접 때 스펙에 대한 질문을 하다가도, 제 차례면 항상 아프리카에 대해 질문했어요. 궁금하잖아요!” 에이칸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급커브 휙휙 돌며 쏟아내는 그의 이야기에 나조차 궁금한 점 투성이었으니까.
태원준_이 친구가 예전에 정말 잘나갔어요.
에이칸_지금은 뭐… 원준이가 대세죠. 부러워요. 빨리 자리를 뺏어야 하는데.
태원준_기꺼이(웃음)
잘난놈 vs 잘논놈
에이칸은 ‘잘난놈’이었다. “은행에서 3년차가 되던 해, 내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사표를 던졌어요. 그리곤 벤처사업을 시작했죠. 오프라인 강연을 중심으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는 회사였는데, 승승장구했어요. 헌데, 파트너와 갈등이 생겼어요. ‘방향성’이 엇갈렸던 거죠. 결국 그렇게 첫 번째 사업에서 손을 뗐어요. 껄끄러운 걸 싫어하는 성격이거든요.” 그가 살아온 인생은 너클볼이 따로 없었다. 휘어 들어오는 이야기의 끝을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잠자코 듣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사업이 끝나고,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어요. 이전의 경험 덕에 수월했죠. 창업 1년 만에 매출 10억을 달성했을 정도니까요. 헌데 이번에도 방향성이 발목을 잡았어요. 임원들간의 투표가 진행되었고, 저는 제가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어요. 연대보증 1억, 부채 2,000만원과 함께 말이죠.”
사실 에이칸의 이야기가 비극적으로 끝나길 원했다. 그래야 재미있을 테니까. 헌데, 재미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깊은 수렁에서 이야기가 끝나 버렸다. 절로 숙연해질 정도로. 이 가슴시린 기억을 달래기 위해, 정확히는 돈을 갚기 위해 그는 호주로 떠나야만 했다. 타지에서 빚을 갚기까지는 딱 1년, 냉동 창고에서 ‘뼈 빠지게 일했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듯하다. “호주에서 빚을 청산하던 날, 다짐했어요, 앞으로 재미있게만 살겠다고.” 그는 곧바로 대학시절 밴드 동아리에서 만난 후배 ‘빽껸’에게 메일을 보냈다.
“21세기 히피가 되자!” 방콕에서 장기 체류 중이던 뮤지션, 빽껸은 에이칸의 제안을 받고 한걸음에 호주로 날아왔다. 터무니없는 제안을 단번에 수락한 걸 보면 에이칸과 같은 베짱이임에 틀림없다. 둘은 호주에서 40만 킬로미터를 달린 고물차를 구입했다. 이후 장장 1만 킬로미터를 더 달렸다. 가고 싶은 곳, 듣고 싶은 것, 음악 따라 이리저리, 끊어질 듯 끝없이 말이다. 에이칸에게는 ‘잘난놈’이라는 수식어보다는 ‘잘논놈’이 어울릴 듯하다. 그가 몰았던 고물차의 행방을 귀띔하자면, 호주에서 누군가의 출퇴근을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돌고 돌아 길 위, ‘잘논놈’ 에이칸을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으려나.
에이칸_원준이는 ‘스티븐 스필버그’, 저는 ‘쿠엔틴 타란티노’와 비슷하죠.
태원준_비유를 해도 그런 거장들을… 제가 대신 죄송합니다.
B급 정서, 나쁜여행
얼마 전 여행작가들이 싫어하는 질문으로 “어디가 가장 좋던가요?”라는 질문이 뽑힌 설문 답변을 봤다. 하지만 결국 물어보고 말았다. “어디가 가장 가 볼 만하던가요?” 중고차 한 대로 세계를 돌아다녔다던 그의 경험 속 신박한 답변이 궁금해서였다. “사실 제가 여행지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물론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곳들은 모두 가 봤죠. 저의 여행은 길에서 만난 뮤지션들과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이를테면 블랙버드 캠핑장이라든가… 보세요! 잘 모르시니까 공감이 안 가시죠? 원준이처럼 누구에게나 통하는 여행 이야기는 아니에요. 마치 B급 영화와도 같은 맥락이죠.” 에이칸의 여행은 느리고 깊다. 한곳에 머물며 그곳의 분위기를 음악으로 소통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의 여행과 음악은 ‘나쁜여행’ 유튜브 채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나쁜여행은 영화로 따지면 B급 영화인 셈이에요. 보통 B급이라고 하면 수준의 차이로 생각하는데 사실 방향의 차이거든요. 추구하는 것이 다를 뿐이죠. 어릴 적부터 B급 문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는 세계 스트리트 뮤지션들과 ‘One Love’와 ‘From the Street’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했다. ‘세계 각국, 지금쯤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고 있을, 혹은 아직 여행 중일 이들의 소리를 글자 삼아 꾹꾹 눌러 담은 한 장의 일기장’. 감상평을 잠깐 남겨 보자면 이 정도가 적당한 듯하다.
No Music, No Travel
“혹시 ‘플레잉 포 체인지(playing for change)’라는 영상 보셨어요? 여행 중 만났던 전 세계 스트리트 뮤지션들의 소리를 녹음하고, 하나로 모아 노래를 만드는 프로젝트에요.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피아노를, 미국에서는 기타를, 프랑스에서는 보컬을, 발리에서는 드럼을! 처음 이 영상을 접했을 때 정말 큰 감명을 받았어요.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프로듀서는 수익금을 전부 기부했죠. 진정 변화를 위한 연주였던 셈이죠. 저도 꼭 이런 작업을 해 보고 싶었어요.”
장소 구애 받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조차 벅찬데, 그는 어떻게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 냈을까. “사실 정말 쉬웠어요. 여행 자체에 대한 즐거움보다 여행 중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즐거웠거든요. 처음에는 같이 일하던 친구를, 다음에는 그 친구의 친구를 만났어요.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친구를 찾아다니다 보면 그 누구라도 만날 수 있는 셈이죠.” 인연은 끝이 없는 법이다. 얼마 전 호주 153번지 셰어하우스에서 만난 ‘로망’이 부산을 찾았다. 로망은 에이칸의 3년간 여행 중 가장 결정적인 순간의 주인공이다. 그로 인해 ‘노 뮤직 노 트래블’이 시작되었을 만큼. 대뜸 부산을 찾아온 로망의 손에는 10년 동안 놓고 있던 드럼스틱이 들려 있었다. “차가운 길 위에서 만난 뮤지션들은 대부분 생계를 위해 음악을 잊고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매번 고맙다며 저에게 인사를 전했죠. 다시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고.” 로망은 프랑스인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개성, 감정적으로 억제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열정이 바로 그의 이름, ‘로망’의 참뜻이다. 에이칸과 로망은 부산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공연을 했다. 관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연신 드럼을 내리치던 로망을 보며 다시금 되새겼다고. ‘No Music No Travel’.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의 노래 ‘Chiller No.5’를 살며시 플레이 리스트에 끼워 넣었다. 냉동 창고에서 만난 친구의 목소리로 녹음했다는 이 곡을 듣고 있자니 여러모로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빽빽이 예약된 아침 알람이, 지하철로 향하는 딱딱한 건널목이, 일상의 견고함이. 모든 것이 녹아 물렁해질 때쯤, 음악과 함께 길 위로 떠나고자 한다, 반드시.
에이칸’s Pick
이 노래, 여기서 꺼내 먹어요
인생에 한 번 아프리카
아프리카 육로 종단여행
레게 하면 자메이카가 떠오르는가. 사실 뿌리는 아프리카에 있다. 힙합, R&B, 록 음악의 시류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동아프리카보다 서아프리카 쪽의 문화가 음악적으로 발달되어 있지만 프랑스어권이다 보니 여행이 힘들다. 영어 사용이 가능하고, 비교적 여행이 수월한 동남아프리카를 시작으로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광활한 대자연 앞, 밥 말리의 레전드 앨범을 듣고 있으면,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평화라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말이다.
추천코스 | 이디오피아→케냐→탄자니아→잠비아→짐바브웨→남아공
추천음악 | Bob Marley Legend(Deluxe Edition 2CD)
가는 길이 맞는 길이요
호주 로드트립
로드트립의 가장 큰 매력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 바로 자유다. 서쪽에서 동쪽을 가로지르며 길 위 수많은 소리들을 만나 보라. 끝없는 자유로움과 창작욕을 마주하라. 공간의 변화가 아니면 해결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풀이를 얻을 수 있다. 여기에 Akan과 Veck이 함께한 앨범 ‘No Music No Travel’을 곁들이면 금상첨화. 특히 6번 트랙, 프랑스 출신 레게 뮤지션 라스 입실로가 참여한 ‘Like a lion’을 강력 추천한다. 아 참, 추천코스는 없다. 본인이 가고자 하는 곳, 보고자 하는 것이 곧 길일 테니.
추천음악 | AV No Music No Travel
<노 뮤직 노 트래블>
글·사진 에이칸│북로그컴퍼니│2018년
3년 동안 여행하며 만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노 뮤직 노 트래블>에 담긴 여행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가 여행했던 여행지 중 호주, 인도네시아 이야기가 전부다. 헌데, 마치 세계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과, 그들의 목소리 때문이 아닐까. 차가운 길바닥 위, 뜨거웠던 에이칸의 나날을 마주할 수 있다.
*에이칸은 ‘나쁜여행’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로컬 기반의 인디 뮤지션, DJ들과 함께 연주하고 파티를 기획하는 등 여행을 통해 서브컬처를 알린다. 현재 그는 남쪽 바다 부산, 햇볕 잘 드는 곳에 작업실을 차리고 칼럼과 음악, 영상작업을 하며 ‘No Music No Travel’ 프로젝트를 이어 가고 있다.
유튜브: 나쁜여행 인스타그램: Badtripkr
글·사진 강화송 기자 여행사진 제공 에이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