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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Apr 18. 2017

[규슈올레] 가고시마현 이즈미,

흑두루미가 나는 평야를 걷다

그래도 나는 산과 길에 대해 나름의 경의를 표하며 살아왔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정상에 가 봤고 안나푸르나도 베이스캠프까지는 다녀왔다. 카미노데산티아고의 850km도  꼼꼼하게 다 걸었고, 제주 올레도 기회가 될 때마다 새로운 구간을 찾아다녔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됐다 싶었는데, 몇 해 전부터 조금씩 마음을 흔들던 이름이 하나 있었다. 규슈올레였다. 일본이여서 그랬던 것 같다. 열 손가락으로 모자를 만큼 여행했지만 대부분 온천, 식당, 박물관, 쇼핑점에서만 멈춰 섰던 여행이었다. 단 한 번 일본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과 정을 처음 느낀 것은 몇 해 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민숙(민박)을 했을 때였다. 일본을 다시 그렇게 만나고 싶었다. 일상적인 삶의 터전과 아무렇지도 않은 자연 속에서 그들의 문화와 역사와 정신을 한 발자국씩 탐험하고 싶었다.   
이즈미시 북쪽의 간척지는 겨울 동안 세계적인 흑두루미 도래지가 된다
인적이 드물었던 숲길에 사람이 돌아왔다


▶NEW 규슈 올레에 신상이 떴다 


규슈에 18번째(가고시마현 이즈미 코스), 19번째(후쿠오카현 미야마·기요미즈야마 코스) 올레길이 지난 2월 17일과 18일에 각각 오픈했다. 두 길을 직접 걸은 것은 오픈행사가 있던 바로 그날. 한국에서 온 참가자들뿐 아니라 현지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축제였다. 2012년에 첫 4개 코스를 오픈한 규슈올레는 현재 총 19개로 늘어났다. 지난 5년 동안 한국에서 15만명이 규슈 올레를 걸었으며 그중에는 전 코스 완주자도 적지 않다.  

규슈올레 정보 www.welcomekyushu.or.kr/kyushuolle   

올레 개장을 맞아 의식을 행하고 있는 이쓰쿠시마신사의 신관
논가에 세워진 작은 석상
간세 모양의 이정표. 신사에서부터 13.8km 이즈미 코스가 시작된다


미션 임파서블은 없다! 


‘처음’이라는 말이 가진 마법은 이번에도 유효했다. 규슈올레 17번째, 18번째 코스가 개장한다는 말에 마음가짐은 어느새 ‘설렘’ 모드가 됐다. 18번째 올레길이 오픈한 곳은 가고시마현(鹿兒島県)의 작은 농촌마을 이즈미시(出水市)였다. 철새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곳이다. 시 북쪽의 야쓰시로해 유역 간척지가 세계적인 흑두루미 도래지*이기 때문. 10월부터 3월 사이에 이즈미를 방문하면 1만 마리가 넘는 흑두루미가 날아오르는 장관도 보고, 올레길도 걸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즈미 코스의 출발지는 물을 관장하는 여신을 받드는 이쓰쿠시마신사(厳島神社)였다. 농사의 성패는 치수에 달린 것이니 풍요의 신으로도 받들어진다. 1573년 창건했다는 오랜 역사를 증명하는 것은 석등의 어깨에 내려앉은 이끼와 거대한 노거수였다. 맑은 샘물이 고인 데미즈야(手水舎)에서 손과 입을 씻은 후 신전 앞의 줄을 당겨 종을 울리고 박수 치는 것이 참배의 절차라면, 올레꾼들의 준비는 신사에서 준비한 시큼달달한 식혜를 한잔 비우고, 지팡이로 쓸 만한 대나무 막대기를 챙기는 일이었다. 신관의 경건한 의식이 끝나자 드디어 올레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즈미 올레코스는 평화로운 농촌마을의 풍광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푸른빛을 띄기 시작하는 논과 소박한 농가를 지나 벚꽃이 만개한 댐 산책로, 숨이 넘어갈 듯 가파른 산길, 그리고 수백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수로를 지나 유서 깊은 무사마을까지 이어지는 13.8km의 길이다. 종종 드리워지는 삼나무 그늘과 키 큰 대나무를 흔드는 미풍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유쾌한 동행이 되어 주는 것은 이즈미의 젖줄인 고메노쓰가와(米ノ津川) 의 청수다. 


들판을 유유히 관통한 길은 고가와댐(高川ダム) 에 이르러 호숫가 산책로를 따라 휘어졌다. 잔잔한 호수를 마주하며 땀을 씻는 동안 들려오는 것은 들새들의 노랫소리. 귀도 싹 씻기는 기분이다. 1973년에 댐이 완공되고 산책로가 생겼지만 그동안은 주민들에게조차 잊혀 있었단다. 올레길 개장을 계기로 나무 벤치를 놓고, 냉천도 다시 복구해서 산책로의 기능을 되살렸다. 


신선한 휴식 뒤에 기다리는 것은 이즈미 코스의 난이도를 ‘상(上)’으로 만들었다는 바로 그 산악산책로(山岳遊歩道)다. 불과 800여 미터의 짧은 구간이지만 줄을 잡고 오르내려야 할 만큼 가파르다. 곳곳에 말뚝을 박고 사다리 계단을 놓았지만 흙길이 미끄러워 정글탐험 수준이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사연을 알고 나면 감히 투덜대지 못한다. 사실 이 길을 뚫지 못했다면 이즈미시는 올해도 올레길을 개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벌써 두 번의 낙방이 있었다. 자연친화적인 길을 고집하는 올레의 기준을 맞추기 위한 최후의 노력으로 산을 넘는 길을 만들었다. 탐사대원이 강물에 빠지는 사고도 있었으니 ‘목숨을 걸었다’는 말이 농담만은 아니다.  

*이즈미의 흑두루미 |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한 마리도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줄었던 흑두루미가 1만 마리 이상으로 늘어나기까지는 정부와 주민들의 아낌없는 노력이 있었다. 각각 53ha, 52ha 규모라는 2개의 보호구역에 추수가 끝난 후, 물을 가둬서 ‘무논’을 만든다. 두루미가 벌레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습지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또한 매일 1.5톤 정도의 먹이를 제공하는데 시베리아로 돌아가는 3월에는 80톤의 먹이(냉동 정어리)를 뿌려서 든든하게 배를 채워 준다. 농지 임대료와 해마다 10억이 넘는 먹이 비용을 정부에서 낸다. 주민들의 역할도 크다. 시즌별로 6차례 정도 개체수를 조사하는데 자원봉사자들이 한 마리씩 그 숫자를 헤아린다고. 지난해 11월 초에 이즈미 평야를 찾아온 흑두루미수는 1만1,872마리였다.  

두루미박물관(크레인 파크)
전화: +81 996 63 8915


두루미관찰센터

오픈: 11월1일~4월 넷째 주 일요일

요금: 어른 210엔   
전화: +81 996 85 5151  

(좌)이즈미시에서는 올레길 인증을 위해 산길을 새로 뚫었다 (우)반가운 표정으로 간식을 나눠주는 주민들


든든한 천생 농꾼, 출수씨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제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 산을 넘은 덕분에 올레길은 다시 고메노쓰가와와 나란히 흘러갈 수 있었다. 이후 다시 강물과 동행했던 올레길은 또 다른 물길을 만난다. 고만고쿠 수로터(五万石溝跡)다. 올레 코스와 겹치는 수로는 총 20km에 이르는 전체 수로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번주가 개간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 사업을 시작했고, 30년 동안 총 23개의 수로를 완성했다. 지금으로 환산하면 170억원의 공사비가 들었다니 5만석(1석은 180kg)의 쌀을 수확하겠다는 뜻이 담긴 고만고쿠라는 이름도 무리한 욕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로는 1734년에 완공되어 240년 이상 들판을 촉촉하게 적셔 주다가 1977년에 임무를 다하고 폐쇄되었다. 산에 길을 뚫는 저력과 끈기가 어디에서 나왔나 했더니 이즈미 주민들의 피에 흐르고 있었나 보다. 


이제 길은 이즈미 시내를 목전에 두고 있다. 조금 전에 이즈미역으로 향하는 신칸센이 지나간 철로를 넘어서면 최종목적지인 이즈미 후모토 무사가옥군(出水麓武家屋敷群)에 도착한다. 후모토는 무사집단의 거주지를 일컫는 말. 규슈 남부 땅을 다스렸던 사쓰마번에는 번주가 있는 본성 외에 외성을 두고, 그 안에 무사들의 집단거주지인 후모토를 조성해 번주를 보호하는 독특한 통치체제인 외성제, 즉 도조세이(外城制)가 있었다. 당시 번주였던 시마즈(島津) 가문은 800년 동안 규슈 남부를 지배한 전설적인 명문가다. 수많은 세력들이 피고 지는 동안 가문을 지켜 낼 수 있었던 이면에는 찬란한 흑역사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가고시마현에는 총 113개의 외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최초로 세워진 외성이 바로 이즈미 외성이고 바로 그 안에 이즈미 후모토가 있는 것이다. 사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여서 위치를 확인할 여력도 없었다. 멀리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길 사이로 사라지는 올레꾼들을 쫓다 보니 갑자기 도로가 넓고, 돌담이 튼튼한 마을이 나타났다. 400년 전에 세워진 마을이라고 믿기 어려운,  국가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国の伝統的建造物群保存地区)다운 위용이었다. 


무사마을에는 여전히 150여 가구가 살아가고 있으니 아무 집이나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상급무사의 집이었던 다케조에 저택(竹添邸)과 사이쇼 저택(税所邸)을 개방하고 있어서 관람하려 했지만 사실 신발을 벗을 힘조차 없었다. 무사의 갑옷이나 기모노를 입어 보는 체험까지는 무리라고 판단. 팥죽 한 그릇으로 원기를 회복하며 18번째 올레 코스를 완주했다. 아침에 내린 그 버스에 거의 꼴등으로 돌아왔지만 오랜만에 뻐근하고 뿌듯한 느낌. 출발 전에는 생소한 도시였던 이즈미시出水市는 어느새 ‘출수씨 안녕~’을 외칠 만큼 올레꾼들에게 정겨운 곳이 되어 있었다.    

후모토 무사가옥군 마을의 어느 주택 담에 붙어 있던 기도상
두루미관찰센터 전망대에서 바라본 흑두루미들


이즈미 코스 | 18코스 거리 13.8km 소요시간 4~5시간, 난이도 中~上 
이즈미시 관광협회 
전화: +81 996 79 3030 
찾아가기: 후쿠오카 JR 하카타역에서 규슈신칸센(1시간 10분 소요)을 타고 JR 이즈미역에 하차. 여기서 이즈미후레아이 버스를 타고 30분 정도 가서 가미오가와우치 버스정거장에 내린다. 여기서 출발점인 이쓰쿠시마신사까지는 도보 1분 거리다.   


글 천소현 기자  사진 김진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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