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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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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 매거진 Jun 07. 2021

감자로 깨우친 여행의 기술,
감자 넌 어디서 왔니?

감자의 고향은 역시나 강원도겠거니 했더니만
세계 어딜 가도 감자가 천지다.
문득 궁금해진다.
감자, 넌 어디서 왔니?


감자, 왠지 ‘신토불이’의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포테이토 게이트


1992년 6월, 미국 뉴저지주의 리베라 초등학교 교실. 공화당의 ‘조지 부시’가 집권하던 시절 공화당 소속 부통령인 ‘댄 퀘일’은 이곳에서 일일 교사로 활동 중이었다. 12세 소년 한 명을 불러내 감자(potato)의 철자를 써 보게 했다. 그 소년은 칠판에 또박또박 포테이토라고 썼다. 그러자 댄 퀘일이 말했다. “얘야, 끝에 e를 빼먹었구나.” 그러자 소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e’를 추가하고 멋쩍게 자리로 돌아왔다. 그 순간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사실 포테이토의 철자는 소년이 제대로 쓴 것이었다. 댄 퀘일은 학교에서 만들어 준 ‘잘못된 정답 카드’를 보며 진행했고, 틀린 철자를 학생에게 가르쳤던 것. 단순 해프닝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 사소한 사건 하나가 일파만파 커져 댄 퀘일은 정치인으로서의 신뢰성에 타격을 입었을 뿐 아니라 부시 행정부에게도 큰 부담을 지웠다. 결국 그는 이듬해 재선에 실패했고, 정치 인생도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의 정치적 의미를 떠나 재미있는 것은 포테이토라는 단어는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들도 종종 긴가민가하게 만드는 철자라는 점이다. 



감자는 본래 남미 중앙 안데스 산맥(지금의 페루)의 야생종이었다. 그러다 기원전 5,000년 경부터 이곳에서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게 됐다. 이것이 16세기 후반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후 유럽으로 전해졌다. 영어 단어 포테이토는 스페인어 ‘patata’에서 유래되었다. 왕립 스페인어 아카데미에 따르면 스페인어 ‘타이노 바타타(고구마)’와 ‘케추아 파파(포테이토)’가 합쳐진 말이라고 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당시 교사 한 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슷한 철자를 가진 토마토(tomato)도 다시 한 번 체크해 봐야 했다고. 재미있게도 토마토 역시 감자와 같은 지역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식물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특히 감자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유럽을 여행할 때마다 지독한 감자 사랑, 감자 자랑에 ‘이 사람들은 감자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싶었는데, 정작 감자의 고향은 유럽이 아니라 남미라니. 게다가 전해진 지 그리 오래된 작물도 아니다. 우리나라는 ‘감자’라고 하면 강원도를 제일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감자가 강원도에 전해진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다. 아무튼 감자가 처음 유럽에 소개될 때만 해도 유럽인들은 모양도 이상하고 게다가 성서에 없는 악마의 음식이라며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감자 없는 유럽이란 상상을 할 수가 없다.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국제감자센터와 협력해 화성과 유사한 환경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영화 <마션>처럼 말이다. 머지않아 일반화될 우주여행에서도 ‘원산지 지구’의 감자는 그 인기를 계속 누릴 것으로 보인다.



“오늘 저녁은 외식이예요!” 영국 남동부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 홈스테이 호스트인 토니 부부는 우리에게 외식을 ‘통보’했다. 나를 포함해 총 4명의 학생들이 이 집에서 머물고 있었으니 매번 밥하는 것도 여간 귀찮은 일은 아니었으리라.

영국에서 첫 외식이라니 나름 기대하며 따라나섰다. 차를 타고 다다른 곳은 마을 외곽의 어느 식당. 그곳은 식당보단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만 같은 곳이었다. 곧장 메뉴판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하는 레스토랑의 메인 메뉴가 고작 감자라니. 크고 투박한 감자를 통째로 구워 토핑과 함께 먹는 재킷 포테이토(jacket potato). 


감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좋아한다는 감자튀김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감자의 이미지라 하면, 어딘가 ‘시골스러운, 특색 없는 텁텁한’이었다.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기보다는 먹을 것 없는 시골에서 배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 그러니까 ‘생존’의 느낌. 때문에 ‘외식까지 나와서 구운 감자라니’라는 생각에 라자냐를 주문했다. 나중에 그 레스토랑이 재킷 포테이토 맛집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딱히 후회는 없었다.

이후 영국의 다른 지방에서 머물며 재킷 포테이토의 맛에 눈을 떴을 때쯤에서야 후회를 시작했다. 바삭한 껍질을 놔둔 채 감자 배를 살짝 가른 후 샐러드나 치즈 등의 토핑을 곁들여 먹는 그 맛. 우리에게 익숙한 재료는 맛있기 때문에 익숙한 것이다. 현지인이 추천하는 것에는 항상 이유가 있다. 감자로 깨우친 여행의 기술. 기억하자.


아침식사로 인기 있는 해쉬 브라운


세계의 감자 요리


오늘날 감자는 옥수수, 밀, 쌀에 이어 4번째로 중요한 작물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품종만 5,000종이 넘는다는 감자는 세계 어디를 여행하나 접할 수 있다. 지난 2020년 미국 CNN에서는 ‘세계의 맛있는 감자 요리’를 선정해 소개했다. 놀라운 것은 감자로 해 먹을 수 있는 요리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 


만두의 사촌, 피에로기


파프리카로 속을 채운 감자


우선 으깬 감자(mashed potato). 유럽에서는 감자를 으깬 후 계란, 버터 등을 섞어 먹는 경우가 많다. 영국의 ‘셰퍼드 파이’가 대표적이다. 한편 ‘감자의 나라’ 아일랜드에서는 으깬 감자를 반죽으로 만들어 프라이팬에서 굽는 ‘감자빵’도 있다. 기름에 튀긴 감자 요리는 대륙을 가리지 않고 인기다. 맥도널드의 아침 메뉴 덕분에 잘 알려진 미국의 ‘해쉬 브라운(Hash browns)’부터 강황 가루와 사프란, 계란 등을 으깬 감자에 섞어 튀겨 요거트와 함께 먹는 이란의 ‘쿠쿠 시브자미니(Kuku sibzamini)’라는 요리도 있다.


치즈와 샐러드로 토핑을 한 재킷 포테이토


감자전은 어딘가 우리나라 전통 먹거리 같지만 비슷한 느낌의 감자 팬케이크 요리가 유럽에도 있다. 스위스의 ‘뢰스티(Roesti)’, 그리고 동유럽의 ‘라트케스(Latkes)’가 그것. 13세기부터 만들어 먹은 폴란드의 ‘피에로기(Pierogi)’는 감자를 삶은 후 속을 채워 튀겨 낸 작은 만두다. 이외에도 앞서 언급한 구운 감자 요리, 감자 샐러드, 삶은 감자, 감자 스튜 등 일일이 나열하려면 두꺼운 책 한 권은 족히 나올 정도다.


같은 튀김이지만 피시 앤 칩스의 감자는 두툼하게 썰어 식초를 뿌려 먹는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전 세계 어디에서나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아마도 ‘감자튀김’일 것이다. 가느다란 감자의 굵기가 특징인 ‘프렌치 프라이’(프랑스와 벨기에가 서로 원조라며 으르렁 대고 있다)와 무식할 정도로 두툼하게 썰어 튀긴 영국의 대표 먹거리 ‘칩스’도 있다. ‘피시 앤 칩스’는 흔한 생선인 대구나 넙치 등과 값싼 감자를 간단히 튀긴 것인데, 19세기 산업혁명 당시 생활이 여의치 않은 공장 노동자들을 먹여 살린 주메뉴였다. 태생이 고급스러운 음식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만큼 우리의 삶과 가장 가까운 식재료가 바로 ‘감자’다. 
 


*유호상은 어드벤처 액티비티를 즐기는 여행가다. 인스타그램 oxenholm



글 유호상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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