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없는 낮, 술이 있는 밤
세상의 모든 여행은 정확하게 둘로 나뉜다. 낮과 밤. 아! 2015년 7월에 떠났던 핀란드 여행은 예외로 한다. 당시 핀란드 로바니에미(Rovaniemi)는 완벽한 백야였다. 낮이야 대개 예정대로 흘러가지만, 밤은 늘 달랐다. 고로 출장이나 여행을 갈 때면 항상 밤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냥 보내는 밤이란 내겐 없다.
여행지에선 늘 술을 마셨다. 요거트나 비타민 워터를 마실 리는 없잖은가. 늦은 시각 호텔에 도착해도 “어서 짐 놓고 나가서 한잔하자!”라고 우겼다. 여행 중 똑딱똑딱 흐르는 시간이 아까웠다. 해가 저물면 바늘이 유난히 빨리 돌았다. 하지만 늘 행복한 밤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서러운 상황도 많았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최악은 이란 여행이었다. 나가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니. 그 아름다운 다리 풍경이 펼쳐지는 이란 이스파한(Isfahan)의 밤에 맥주를 마실 곳이 없다는 것이 대체 말이나 되는가. 페르시아의 푸른 밤, 고도(古都)의 유적 앞에서 고작 레몬주스나 석류즙 따위를 마셔야 한다. 양탄자는 그저 잠이나 자라고 깔아 놓은 것일 뿐, 나의 소중한 술자리는 그렇게 5일간 사라졌다.
상실감에, 아니 좌절에 몸서리쳤다. 침대 베개에 고개를 묻고 LG TV에서 아랍어로 흘러나오는 국제 정세 뉴스를 들으며 기나긴 밤을 보내야 했다. 요르단 암만(Amman)에서 선택한 칵테일 롱아일랜드 아이스티는 암만 생각해도 좋은 선택이었다. 오만 무스카트(Muscat)에는 나이트 클럽도 있었다. 이집트는 무슬림 국가지만 맥주를 처음 발명한 종주국답게 꽤 구수한 맥주 바가 카이로에 있었다. 이스탄불의 밤은 웬만한 유럽 시골 도시보다 더욱 뜨거웠다. 매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밤을 충실히 즐겼다. 일행의 방해(?)로 그냥 잠만 자야 했던 날도 있었지만.
갯바위 위 갯강구
노르웨이 크리스티안순(Kristiansund)에서의 일이다. 일행 중 ‘박x일’ 이란 선배가 있었는데,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그때도 역시 중늙은이였다. 마지막 밤이니 호텔 방에서 마시자며 그 비싼 ‘한자(hansa) 비어’를 잔뜩 사 왔는데 난데없이 샤워를 하고 오겠다는 것이 아닌가. 북구의 4월이란 것이 땀을 많이 흘릴 기후도 아니었고, 심신을 정제해야 할 누군가를 만난 것도 아니다. 딱히 샤워를 해야 할 마땅한 상황이 있기란 만무했다. 게다가 멍하니 그 표정을 바라보자니 왠지 불길했다. “하하하 우석씨 금방 올게. 마시고 있어”라 했지만, 그 눈빛은 “하하하 넌 혼자 마시게 될 거야, 오아시스를 찾아온 가젤 영양처럼”이라 말하는 듯했다.
슬픈 예감이란 원래 틀린 적이 없다. 시간은 흐르고 맥주는 내 방 설정 온도와 가까워져 가는데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페이스톡도 무용지물이었다. 라이언 일병 구조대처럼 6층 어딘가에 있을 박 선배를 찾아 방마다 문을 두드리다 ‘이상한 욕’을 듣기도 했다. 욕은 아마도 독일어였던 것 같은데 영 알아들을 수 없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무겁고 값비싼 맥주를 남긴 바람에 여행 가방이 무척 무거워졌다는 점이 나를 슬프게 했다.
또 한 번은 일본 이바라키에서 일어났다. 일행 중에 ‘김x수, 이x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과 일본 소도시에서의 ‘나이토 라이후(night life)’를 함께했다. 이들은 첫날 저녁식사 후 시내로 나가기로 의기투합했으나 불행하게도 둘 다 술을 정말 잘 못 마시는 일명 알찌(알콜 찌질이)였다. 불과 2박3일짜리 여행이었는데 첫날 마신 술을 혈액에 넣고 인천공항까지 왔다.
모츠니(곱창찜)가 먹고 싶대서 거액(?)의 외화를 들여 사 줬는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큰 소주병을 들고 입에 대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는 등 떠들썩하게 놀더니 그만 고주망태가 돼 버렸다. 길에다 거액을 토해 내고 가로수에 로우 킥(low kick)을 하더니 갯바위에 돌아다니는 갯강구처럼 길을 누볐다. 호텔 방까지는 잘 들어가는 듯했지만, 다음날 오전 내내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음날 늦은 점심이 되어서야 갯강구가 다시 출몰했고 그들은 일제히 겐친소바(겐친은 두부, 우엉, 표고 등을 기름에 볶아 조미한 음식이나 채소를 두부껍질에 말아 기름에 튀긴 일본 식자재다) 그릇에 코를 박으며 회생을 꾀했다. 그들은 정말 엄청난 고난을 겪고 난 것처럼 물을 찾더니, 역시 내 외화로 구입한 소바 국물을 마시고서야 겨우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었다.
“너희들 어젯밤 방에 들어가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이제 그런 건 흉도 아니니 고백해도 된다”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들이 어법에 안 맞는 말을 되풀이하더라도 차분히 들어줬다. 뜨거운 국물은 그들의 말문을 트이게 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잠재우는 최면법을 선택했다. 난 버스 뒷자리에서 2구의 변사체처럼 잠든 그들을 보며 정말 죽음보다 깊은 숙취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검문에라도 걸렸으면 버스 안의 사람들은 모두 당장 체포되어 미란다 원칙을 듣게 될 것이다.
숲속의 공주처럼, 물속의 지니처럼, 나무늘보처럼 오랜 시간을 자고 난 후에야 그들은 깨어날 수 있었다. 다만 그때는 모든 일정은 끝나 있었고 여권을 출국 심사대에 내밀어야 했던 시각이다. 이바라키 측 초청자들이 끝까지 나를 원망했음은 물론이다. 거액의 외화를 탕진하고도 욕을 먹었다. 애꿎게도 그날 밤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한 죄를 내게 묻는 듯했다. 분명히.
마리아나 해구만큼 깊은 숙취
울란바토르(Ulaanbaatar)를 제외하고 온통 사막과 초원인 몽골은 나이트 라이프가 전혀 없는 곳이라 상상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언제나 나이트 라이프를 사랑했지만 나는 이곳에서 ‘아,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나라에 볼모로 끌려온 고려의 왕자처럼. 즐거운 여행지에서의 밤에 대한 감상문이 아니라, <리더스 다이제스트> 같은 잡지에 나오는 생존의 기록이 그 영롱한 별빛 아래에 남는다.
몽골 바양고비는 밤이 되자 신비롭게도 거대한 초원 술집이 되었다. 우리 일행 중에 ‘누룩에서 환생한 인류’가 한 명 있었던 까닭이다. 아가씨다. 미혼 여성이지만 술자리에선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과시한다. 효도르랄까, 파퀴아오? 여러 명을 혼쭐내 줬다, 술로. 내게도. 자주. 혈관 중 헤모글로빈보다 더 많은 알코올을 담은 채로 살아가는 게 분명한 사람이다.
초원의 태양이 투수의 직구처럼 꽂히며 지평선에 스며들자, 새파란 커튼 같은 밤이 설설 내려왔다. 곧 게르의 문이 닫히고 바로 커다란 보드카 술병이 열렸다. “호호호 운전하느라 고생하셨는데, 한잔하셔야죠! 이 칭기즈칸의 후예들아.” 술은 콸콸 잔에 가득 채워지고 이를 지켜보던 몽골인의 입에도 자물쇠가 채워졌다. 여행작가 ‘최x수’도 있었는데, 그는 커다란 눈만 껌뻑일 뿐, 급성 실어증에 걸린 듯했다. 갓 죽은 양을 앞에 두고 몇 순배의 미지근한 보드카가 돌았다. 나도 돌았고 최작가도 돌았다. 차라리 양이 부러웠다. 그나마 단숨에 죽었으니 말이다. 단호한 ‘누룩의 환생 인류’는 내 술잔(물컵)이, 건조한 이 나라에서 자연적으로 증발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우린 모두 춤을 추고 있었다. 한국인도 몽골인도, 누룩도. 그 순간 죽은 양이 벌떡 일어나 춤을 추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나가야겠다. 내겐 한국에 두고 온 가족이 있어!’ 소변을 보겠노라고 비틀거리며 게르를 빠져나와 바로 누웠다. 아니, 쓰러졌다. 등 밑에는 양과 말의 똥이 잔뜩 깔려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하늘엔 은하수가 펼쳐졌다. 창백한 하얀색, 그 별의 흐름이 좀 전의 보드카 술 줄기로 보였다. 눈물이 소변 대신 흘러 그만 난 눈을 감고 말았다. 새벽, 영화 <레버넌트>와 비슷한 꿈을 꾸었고 초원의 태양이 다시 떠올라 죽은 나를 살려 냈다. 난 보드카의 심해에서 간신히 나와 이 순간 생존자의 보고서를 적고 있다. 잊지 못할 여행의 밤들. 방역시대에도 매일 밤이 찾아오지만 나는 여전히 낯선 도시에서의 밤을 헤아리고 있다. 다시 밤을 찾아 여행을 떠나리라, 낮엔 푹 자고 깊은 밤을 누빌 거다. 꼭, 다시.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