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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Apr 02. 2021

자산어보, 흑백으로 담아낸 소설

요즘은 영화 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한때 1년에 100편의 영화를 보겠다고, 시사회에서 영화제까지 열심히 찾아다니던 때가 아득한 옛날 같네요. 요즘에 극장에선 1년에 5편 보기도 쉽질 않습니다. OTT 덕분에 시간과 장소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볼 수 있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래도 고소한 팝콘 냄새와 어둑한 분위기 속에 몰입해서 보던 즐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죠..


'승리호'까지 넷플릭스로 향한 이 와중에 용감하게 극장 개봉을 택한, '자산어보'를 봤습니다. 처음 예고를 봤던 게 꽤 오래전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개봉 소식 듣고 바로 달려갔죠. 역시 이준익 감독의 역사극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최근 작품들은 인문학적인 감성들이 가득하더군요. 아마도 '사도' 때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자산어보'가 왜 이 시국에 OTT로 가지 않고 극장 개봉을 '감행(?)'했는 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가급적 극장에서 보시길 권해 드리고 싶네요.




수묵화(水墨畵)를 닮은 영화.


'자산어보'는 흑백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고 이준익 감독이 '동주'이후로 저렴하게 영화 찍는 데 맛들렸나보다,라고 농담처럼 얘기했지만, 흑백 영화도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영화는 먹으로 그린 듯 담담하고 묵직하죠.


가끔 자산의 자연 풍경이나, 펄떡이는 생선, 싱싱한 해물들이 나올 때 컬러로 보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사실 이 영화는 꼭 돈 때문에 흑백으로 찍은 것 같진 않습니다. 극장에서 보시면 느끼실 수 있을 듯한데, '동주'의 경우 약간 거친 느낌의 흑백이라면, '자산어보'에서는 컬러로 찍은 영상을 흑백 필터를 씌울 때처럼 약간의 컬러감이 느껴지기까지 하더군요. (일부 장면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수묵화처럼 색(色)을 빼고 보니, 아무래도 극의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에 좀 더 집중하게 되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면 좋은 책 한 권을 막 읽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묘사가 뛰어난, 또는 삽화가 충실해서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소설이랄까요. 이 영화는 그런 문학점 감성을 좋아하시는 분께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또 '자산어보'는 역사적 의미를 꽤 많이 담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허울뿐인 유학을 숭상하고, 출세를 꿈꾸는 '창대', 또는 망해가는 '조선'과 '정약전'의 대립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 창대에게 갈등을 유발하는 혹세무민은 그가 봤다는 '파랑새'(이 영화에서 거의 없는 컬러 장면)와 대비되어 동학의 상징처럼 묘사되죠. 정약전이 '서학'으로 유배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이러니하긴 합니다.




배우열전, 우정출연 또는 카메오들.


기본적으로 '자산어보'를 이끌어 가는 이는 '설경구'(정약전)와 '변요한(창대)'인데, 조연 및 우정출연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들을 다 모았을까 싶을 정도죠.  


아마도 흥행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영화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꽤 서사적이라 배우의 힘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칫 지루해지거나 극의 몰입을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들을 배우의 연기와 익숙함(즉 인지도)으로 극복하죠. 이러한 방식은 영화 '1917'에서도 쓰인 바 있는데, 당시 거의 무명이었던 주연배우 대비, 베네딕트 컴버배치, 콜린 퍼스, 앤드류 스캇 등이 카메오 수준으로 등장하죠.


가거댁이 이정은 배우가 아니라면? 별장이 조우진이 아니라면? 류승룡, 최원영, 김의성 등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다소 밋밋하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진짜 돈이 없어서 흑백으로 찍었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었을 수도..)

개인적으로 '설경구' 배우가 왕년의 명성에 비해, 최근에 작품으로 주목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이 작품을 계기로 좀 더 좋은 작품들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저는 이 영화를 수요일 저녁에 봤는데, 바로 집 앞 (걸어서 10분?)에 CGV가 있어 이른 저녁을 먹고 편하게 나갔죠. 예상엔 극장이 텅텅 비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있어 놀랐는데요. 자연스럽게 입장하는 사람들 따라서 들어가려고 하니 거긴 '고질라 vs. 콩'을 하는 곳이더군요. 좀 비약이지만, 일본과 미국 괴물들 보다는 자산어보를 많이 봐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좀 전에 박스오피스 확인해보니 자산어보가 1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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