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하 '귀멸')이 국내 개봉을 했습니다. 요즘엔 극장보다는 넷플릭스 등 OTT 위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경향이라 그다지 큰 반향은 없는 듯하지만, 그래도 계속 2위 정도를 유지하며 일정 관객이 들고 있는 듯합니다.
저도 얼마 전 극장판 '귀멸'을 보고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 스토리보다는 배경 이야기를 주로 할 생각이라 스포일러는 거의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귀멸'은 일본 영화계에서 무려 19년간 흥행 1위에 올라있던 지브리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누르고, 극장 수익 1위에 오른 애니메이션입니다 (그것도 코로나 와중에). 관객수 기준으로는 무려 2,400만 명을 넘었다고 하는데요. 참고로 우리나라 1위 '명량'이 1,760만 정도이니, 인구수 대비해서 보면 '명량'은 전무후무한 스코어가 되지 않을까요?
또 원작 만화의 경우, 제22권이 초판만 무려 370만 부를 발매 해, '원피스'가 갖고 있던 300만 부의 기록을 깨고 1위에 올랐는데, 마지막권인 23권은 395만 부를 찍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역대급 괴물이 등장한 셈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의 역대 흥행 수익 10위 내 작품에서 애니메이션이 무려 6편이고(겨울왕국 포함), 해리포터 시리즈가 2개, 나머지 2개는 '타이타닉'과 '춤추는 대수사선'인데요. 일본이 얼마나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죠. 반대로 따져보면, 10위 안에 독립적인 자국 실사 영화('춤추는 대수사선'은 TV 드라마의 극장판)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일본 영화계의 독특한 생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귀멸'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약간 설명을 더 보태자면, 원작 만화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되었고, 단행본으로도 마지막 23권까지 완간됐습니다(국내는 현재 22권까지 발매) TV용 애니메이션이 총 26회로 제작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선 'TVING'에서 볼 수 있으며, 곧 '넷플릭스'에서도 서비스 예정이죠. (2월 21일 오픈). 이번에 개봉한 극장판은 TV판의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이라, 극장판을 보실 예정인 분이라면, TV판을 먼저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용은 '오니*'에게 가족을 잃은 주인공 '탄지로'가 복수를 하는 내용인데.. 중국 무협영화를 통해 많이 접했던 설정대로, 주인공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무공을 연마해 악당들을 하나씩 해치우죠. 구조 자체는 굉장히 단순하고 권선징악적입니다만.. 요즘의 좀비물처럼 식인 장면이나, 신체가 잘려 나가는 장면들이 아주 예사로 등장합니다.
오니(鬼) : 국내 만화판에선 ‘도깨비’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귀멸'에서는 사실 좀비에 더 가깝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한때 우리나라에서 '도깨비'가 뿔 달리고 방망이 들고 있는 괴물 이미지로 묘사되곤 했는데, 이는 일본의 영향입니다. 우리가 생각보다도 훨씬 많은 영역에서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그리고 꽤 오래 이를 방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귀멸'의 배경은 '다이쇼 시대'(1912-1926)입니다. 일본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메이지 시대'와 군국주의가 본격화되는 '쇼와 시대' 사이에 위치한 15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죠.
'다이쇼' 때에는 '메이지 유신'*의 성과가 어느 정도 나타나면서 현대 일본의 틀이 잡혀가는데, 내부적으로는 산업화와 민주화(다이쇼 데모크라시)가 본격화되고, 외부적으로는 대만과 조선을 흡수해서, 일본의 입장에선 '화양연화'와 같은 시기로 기억되죠. 1980년대 '쇼와'의 경제적 성과가 지금의 현실과 비교하게 되는 씁쓸한 영광이라면, '다이쇼'는 경험해보지 못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라 할 수 있죠.
* 유신 : 일본은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혁명이라는 말 자체가 왕을 갈아치운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왕이 바뀐 적이 없는 일본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표현이죠. 따라서 유신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다이쇼 로망'입니다. 하지만 다이쇼는 우리의 식민지 시기와 겹치는 때라, 이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이 곧 제국주의자 내지는 극우로 인식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죠. 최근 스포츠계나 연예게에서 '학폭'이 이슈가 되고 있는데.. 가해자가 그때가 참 좋았지.. 하고 그리워한다면 맞은 사람 입장에선 울컥하게 되겠죠? 비슷한 예로 '다이쇼 로망'은 아니지만, 지브리 스튜디오의 88년작 '반딧불이의 묘' 같은 경우, 일본을 전쟁의 '피해자'로 인식시킬 수 있는.. 지나치게(?) '감동적'인 이유로 국내에서는 평이 좋지 않았습니다.
여튼, '귀멸'에서의 '다이쇼'는 '오니'나 '귀살대'처럼, 어찌 보면 전설 속 판타지를 풀어낼 수 있으면서, 동시에 21세기 시청자들에게 공감될 수 있는 시대로 '다이쇼'를 선택한 듯합니다. 영화에서는 등장하지 않지만, 오니들의 최종 보스인 '무잔'은 도시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고, 이번 극장판에서 오니가 근대화의 상징인 '철도'를 거점으로 삼는 점 등 '귀살대' vs. '오니'의 관계를, '전통' vs. '근대화'라는 다이쇼만의 시대적 분위기와 연결하고 있죠.
얼마 전 도쿄올림픽 조직위원장이 여성 폄하 발언을 했다고 사퇴를 하는 일이 있었죠. 저는 한편으로 일본에서도 이런 발언이 이슈가 되는구나 하고 오히려 좀 놀랐습니다.
일본의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남성 중심의 사고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죠. (물론 여성을 위한 만화나 애니도 큰 시장으로 존재하니, 그냥 표현의 자유로 볼 수도 있지만)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남자 친구 집에 가서 매번 밥을 해주는 순종적 여성의 모습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들이 왕왕 등장합니다. 일본에서도 물론 양성평등에 대한 이슈가 없는 것은 아닌 듯 하지만 '여자력(女子力)*'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걸 보면 여성들의 인식도 국내와는 좀 다른가 봅니다.
* 여자력 :쉽게 말해 여성스러움을 더 키워 역량을 강화하자는 겁니다. 요리라던가, 부드러운 말솜씨라던가..
'귀멸'의 경우 역시 지극히 남성적인 관점들을 선보이는데, 특히 여자는 16살이 넘으면 맛이 없어진다는(여기서 '맛'은 실제 '식인'을 의미하지만) 대사가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죠. 더구나,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이 작품의 원작자인 '고토게 코요하루'가 여성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니까요.. (밝혀졌다는 표현이 좀 어색한데, '귀멸'의 작가는 대외적인 노출을 하지 않아 알려진 게 없거든요.)
얼마 전 '기안 84'의 웹툰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와 일본은 만화, 또는 대중문화를 보는 인식에 확실히 차이가 있는듯 하네요. 어릴 때부터 일본 만화나 애니를 많이 보고 자랐을 국내 웹툰 작가(또는 만화가)들 입장에서는 국내 여론의 역풍이 되려 당황스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구요.
또 한 가지의 전형성은, 이번 극장판 '귀멸'에서도 여지없이 '교훈 씬'이 길~게 등장하는데.. 이런 장면에선 꼭 등장인물 모두가 폭풍 오열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90년대 초 정도까지는 계몽적인, 문화 영화류의 작품들이 있었습니다만, 나름대로 일본 드라마나 애니에 익숙한 편이라 생각하는데도 이런 장면이 아직 오글거리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네요.
일본에서 일부 언론과 네티즌 사이에 '귀멸'은 불매운동 안 하냐며 비아냥대는 의견들도 있다는데요. 사실 이 작품이 겨울왕국처럼 아이들이 n차 관람을 할 성격도 아니고, 국내에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성인층들도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닌지라.. 따로 걱정(?)해주지 않아도 엄청난 관객이 들 것 같진 않습니다. 다만, 넷플릭스에 TV판이 올라온 이후엔 좀 더 반응이 있지 않을까 싶네요.
비록 이런저런 논란도 있고 작품성에 대한 이견도 없지는 않지만, 일본인들은 대체 왜 그렇게 많이 봤을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비교해서 한번 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