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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Apr 10. 2020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평범함 속에서도 악은 태어날까?

워낙 유명한 책이라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교보문고에서 섬뜩한 리뷰들을 보고 생각을 접었더랬죠. 번역에 대한 악평이 장난이 아니었으니.. 그럼에도  책을 읽게  것은, 주변(참여하고 있는 독서모임 최근 읽었던 소설, 디디의 우산)에서 계속 언급이  데다, '정의란 무엇인가' 해제를 맡은 분이  책의 번역자라는 것에  어느 정도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래에 다시 적기로 하고,, 아렌트가  재판을 'SHOW' (아이히만 쇼라는 영화도 있죠) 명명한 것에 맞추어 이 리뷰도 연극처럼 시작을 해볼까 합니다. 




# 1. 정의의 집 (Beth Hamishpath)


무대가 밝아지며 막이 오르면 이 '쇼'의 주요 등장인물들이 등장한다. 먼저 작품을 기획한 '다비드 벤구리온' (이스라엘의 수상) 그는 무대에 직접 오르진 않는다. 한쪽엔 원고 측인 '기드온 하우스너'와 검사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 피고인이자 주인공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유리 부스 안에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과 '세르바티우스' 박사(아이히만의 변호사)까지 오르면 '쇼'는 시작된다. 


아이히만이 부스 안에 피곤 얼굴로 앉아 있다.


다소 아이러니 한 점이라면 쇼의 '메인 스폰서'가 피고 측이라 볼 수도 있는 아데나워(서독의 수상)라는 점이다. 지난 10여 년간 무려 737만 달러를 쏟아부었다는데, 현재 벤구리온은 아데나워와 추가 투자(?)를 위한 협의도 진행 중이다. 또한 이 쇼는 미국의 한 회사가 독점 중계권을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로 생중계된다. 


재판 기간 동안 검사에게 기자회견과 TV 인터뷰가 허용되었다.
심지어 검사는 법정 건물 밖에서 '즉흥적인' 감정을 분출하기도 했다.
...
이로 인해 그는 결국 백악관의 인정을 받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업무를 잘 수행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현장에 있는 비평가 '한나 아렌트'는 이 자리가 불편하다. 아렌트 역시 유대인이고 수용소 출신이지만. 공감이 가질 않는다. 아렌트의 주장을 들어 보자..


첫째, 주최 측(벤구리온)은 이미 결론이 뻔한 드라마에 억지로 내용을 끼워 맞추고 있다. 더구나 재판(검사 측의 주장)이라는 것은 유대인이 겪은 핍박들을 홍보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송 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겪은 모든 것을 법정으로 가져와서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히만과 일어난 사건들을 연결하기 위한
증거를 찾으려는 것은 비논리적이지 않은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54p


둘째, 빌런 역할을 맡은 '아이히만'의 중량감이 너무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점이다.

유대인과 관련된 모든 죄를 덮어 씌우기엔 너무 하찮고 무능력한 인물이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06p


셋째, 주최 측의 이중 잣대이다. 그들은 인종적 편견의 범죄를 벌하는 쇼를 기획하면서, 스스로 인종적 편견은 외면한다. 또 벤구리온은 정의 실현의 미명 하에 아르헨티나에 숨어 있는 아이히만을 불법적으로 납치해서 자국의 법정에 세웠다. 


아렌트의 스승이기도 한 '카를 야스퍼스'는 이에 대해 "유대인에 대한 모든 범죄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며 "따라서 판결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법정 (국제 재판소를 의미)에서만 내려질 수 있다"라고 비판한다. (피해자인 이스라엘에 이를 공정히 다를 수 있는가를 넘어, 나치와 아이히만의 범죄 당시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의 법률도 존재하지 않았다) 


만일 내일 어떤 아프리카 국가가 요원을 미시시피로 파견하여
거기서 흑백 분리 운동의 지도자 한 명을 납치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그리고 만일 가나와 콩고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아이히만 재판을 선례로 인용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응답할 것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64p


아렌트는 이와 같이 이 재판에, 그리고 이 재판을 진행하는 이스라엘의 정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에 따라 유대인 세계에서 엄청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제삼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아렌트의 입장이 더 이해가 갈 수 있을 듯한데, 판단은 각자의 독자들이 할 일이다.




# 2.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


아이히만은 이 법정에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아이히만은 "신 앞에서는 유죄라고 느끼지만 법 앞에서는 아니다" 아이히만의 죄에 대해 아렌트는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그는 결코 유대인 혐오자가 아니었고,
그는 결코 인류의 살인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죄는 그의 복종에서 나왔고, 복종은 덕목으로 찬양된다.
그의 덕은 나치스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43p


아이히만은 자국의 법과 명령 하에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이 무엇이 있겠는가?라는 것이 아이히만이 생각(또는 주장)이다. 전쟁에서 적을 살상했다고 해서 유죄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논리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쟁이 아니며, 대량학살(genocide)이다. 물론 아이히만은 자신은 학살에 직접 관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책의 핵심은 아이히만의 법적인 유무죄를 가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사형을 언도받고 사라졌다. 이 책의 부제에 적혀 있는 대로, 'banality of evil'이 이 책 자체를 대변하는 말이 됐다. 이를 '평범성'이 아니라, '진부함'이나, 아니면 '상투성'이나,, 여러 말들이 많은데, 전문 번역가가 아닌 이상 어떻게 번역하는 게 맞느냐보다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을까? (banality라는 단어를 아렌트가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아렌트는 악이 '생각 없음' (무사유)의 결과가 될 수 있음에 주목한다. 아이히만은 적극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유대인을 싫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아니면 애써 무시한) 결과들로 인해 그는 악의 대리인이 된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이스라엘이, 유대인이 저지르고 있는 '정당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어쩌면 그들도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을 애써 외면하고 있진 않은가? 그럴수록 더 깊은 악의 유혹에 빠져, 어느 순간엔 아이히만처럼 자신은 '무죄'라 여기진 않을까?




솔직히... 근래 들어 이렇게 어려운 책을 접해보지 못했습니다. 개념의 어려움도 있겠으나, 번역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거든요. (너무 답답해서 아마존에서 원문을 구해 번역기에 돌려 봤더니, 책에 있는 내용과 거의 똑같이 나와 깜짝 놀라기도 했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읽은 책 중에 가장 좋은 책이었습니다 (벌써 결론 내리긴 그렇지만 아마도). 쉴 새 없이 밑줄을 그으면서 보느라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그러기에 더더욱 아쉽더군요. 내가 놓친 부분들이 더 없지 않을까 싶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의 식민지 역사와, 그리고 친일파의 주장과 관련된 부분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지라 여러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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