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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Dec 23. 2020

공산당 선언, 마크르스&엥겔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끝났을까?

유령 하나가 유럽을 떠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다.
낡은 유럽의 모든 세력,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 경찰이
이 유령을 퇴치하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고 몰이사냥에 나섰다.

정권을 잡은 상대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고 매도당하지 않은 반대당이 어디 있으며,
자기보다 더 진보적인 반대파뿐만 아니라 반동적인 정적에게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은 반대당은 또 어디 있겠는가?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앵겔스


마르크스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자본론>이며, 그다음이 <공산당 선언>이다. 이 책은 선언(manifesto)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정권을 잡은 상대당으로부터 공산주의적이라고 매도당하지 않은 당이 또 어디 있으며.. 공산주의라는 낙인을 찍으며 비난하지 않은 반대당은 또 어디 있겠는가?' 


쓰인 지 170년(1848년 출간)이 넘은 책이지만, 얼마 전까지 한국 정치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다. (물론 아직도 빨갱이 운운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계급투쟁의 역사


우습지만,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처음 샀던 건 대학 신입생 때다. 386세대는 아니지만, 대학가 근처에 살아 어릴 적부터 최루탄 냄새가 친근했고, 왠지 '불온서적(?)' 몇 권 정도는 읽어줘야 진짜 대학생인 것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동네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몇 번 망설이다(주인아저씨가 신고할까 봐?) 구매했던 기억이 있다. (돌이켜보면 주변에 대학도 딱히 없는 동네서점 -당시엔 신도시였던 분당으로 막 이사를 했을 때- 에 이 책이 왜 있었을까 싶다. 아마 한때 운동권이었던 아저씨의 취향이었을지?)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
자유민과 노예, 도시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장인과 직인,
간단히 말해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늘 서로 대립하면서, 때로는 암암리에 때로는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투쟁을 전개해왔다.
이 투쟁은 언제나 사회 전체의 혁명적 개조를 가져오면서 끝나든지,
아니면 서로 싸우던 계급이 모두 몰락함으로써 끝이 났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앵겔스


마르크스는 '역사'를 계급투쟁의 과정으로 정의하며, 앞으로의 역사를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간의 투쟁이 될 것임을 주장한다. '계급'은 결국 사회의 주요 생산수단을 누가 점하고 있느냐에서 발생하는데, 지금까지도 마르크스적 분유에 따라 통용되는 역사 발전 5단계설(원시 공산제,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 공산주의)은 생산수단 및 착취와 피착취자와의 관계 변화에 따라 시대를 분류하고 있다. 


자본주의 계급을 표현한 노동조합 포스터 (1911)


마르크스의 영향으로 다소 부정적인 어감이 되었지만, '부르주아' 역시 한때는 'Viva Republica'로 대표되는 혁명의 주체 계급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에 의해 이들을 오직 '돈' 밖에 모르는 집단으로 재정의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지배권을 쟁취한 곳에서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인 일체의 관계들을 파괴해버렸다.
그들은 인간을 타고난 상전들에게 묶여 놓았던 갖가지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사정없이 끊어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적나라한 이해관계, 차가운 '금전 지불' 말고는 아무런 유대도 남겨 놓지 않았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앵겔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론'의 영향은 꽤나 강력해서, 우리나라에서도 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의 기반이 된다. 한국 사회는 어떤 계급 구조를 가지고 있는가?를 규정하기 위함인데, 관점에 따라 '민족해방'(NL, 흔히 주사파라 부르는..), '민중민주'(PD, 노동자해방) 계열로 정리된다. (대학 때 학교 언론에 있었던 지라 이런 용어가 익숙했는데, 의의로 이런 용어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우리가 흔히 386이라 부르는 세대는 대개 이러한 논쟁 속에 정치인이 됐다. 지금도 운동권 계열 정치인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NL계열(주로 '민주'당)은 주류가 되고, PD계열(주로, '진보'당, '정의'당)은 비주류가 됐다. 물론 골수 NL들이 있었던 통진당은 강제로 해산이 됐지만... 


이런 계급투쟁이 관점이 좀 올드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현재의 이념 갈등 역시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른 '투쟁'의 연속이다. 이젠 거리에 나가 외치기보다는 댓글이나, 유튜브를 통해 목소리를 높인다는 게 좀 달라졌을 뿐..?  




생산수단의 대중화 


마르크스는 '매뉴팩쳐'를 중심에 놓고, 결국 생산수단을 소유할 정도의 대자본가가 아닌 이상 프롤레타리아는 계속 착취당할 수밖에 없다고 봤다지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체제의 최종 승리일까라고 보면 또 그것은 아니다. (그렇게 선언했다가 취소한 학자도 있다. 이른바 역사의 종말*)


*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주장한 개념으로, 역사 발전은 공산주의로 귀결되는 5단계가 아닌,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된다는, 즉 자본주의가 최종적인 역사의 승리자라는 내용. 추후 후쿠야마는 이 주장을 철회했다.

  


'자본'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강력하고 영악해서, 이젠 딱히 '생산수단'(기계)이라는 것이 없어도 스스로 부를 만들어 내고 불평등을 가중시킨다. 이제 생산수단이라는 것은 제3세계에 공장을 만들거나, 아예 주문자의 브랜드만 붙여 파는(OEM) 방식 등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를 저 멀리에 격리시킨다. 오늘날 선진국의 프롤레타리아는 '노동'을 착취당하는 것이 아닌 '노동'조차 할 수 없는 계급을 지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개인적으로 마르크스가 예상한 방향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폭발하는 단계까지 가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세계화'에 있다고 생각된다. 예전엔 '제국주의'라 불려진 것의 일종의 유사품이다. 부르주아에 비해 벌이가 시원치 않은 흙수저 들은 싸게 생필품을 공급받아야 한다. 그 역할을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어린아이 일 수도 있고, 등 굽은 할머니일 수도) 대신한다. 우리는 그들이 생산한 밀가루로 만든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신발을 신고 행복해한다. 강대국들은 자신들이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는 '종이'(달러, 유로, 위안.. 등) 쪼가리로 이런 땀의 결과들은 손쉽게 가져올 수 있다. 


지금의 세계는 또 달라진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서 '부'를 실어 날랐다면, '통신'의 발달은 '플랫폼 혁명'을 만들어 냈다. 이제 매뉴팩처 방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생산 시설이나, 서비스 인력의 보유 여부는 더 이상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화폐의 개념 또한 달라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택시 회사 Uber는 한 대의 자동차도 보유하지 않고,
세계 최대의 미디어 회사 Facebook은 콘텐츠를 생산하지 않으며,
최대의 기업 가치를 지닌 소매 기업 Alibaba는 재고가,
 또 세계 최대 숙박업체 airbnb는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플랫폼 레볼루션>에서 재인용.


플랫폼 혁명은 '무산 계급'에게 기회를 만든다. 이제 상점이 없어도 '네이버 스토어'나 '쿠팡'에서 물건을 팔 수 있고, 4대 매체에 광고를 집행할 돈이 없어도 '페이스북'이나 '구글'을 통해 타게팅 광고를 할 수 있으며, 이메일 마케팅은 '스티비'나 '메일 침프' 등으로 자동화할 수 있다. 무형화된 생산수단들이 거의 무료, 내지는 수수료 개념으로 제공되면서, 기존의 물리적인 개념에서의 생산수단은 더 이상 착취, 피착취의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다. 


그럼, 이대로 역사는 끝나는 걸까?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플랫폼 혁명은 가치의 창출이 굳이 '생산 수단'이나 '대자본'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었다. 반대로 '자본' 역시 굳이 '생산'을 기반으로 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의 자본은 부동산이나, 각종 금융 거래를 통해 자가 증식을 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붕괴의 요소로 지적했던 '공황'은 이제 '금융 위기'로 대체된 지 오래다.


그럼 '자본'을 기반으로 한 '불로소득의 계층'과 '노동자'(이제 '노동자'는 '블루 칼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소득을 갖지 못한, 노동을 해야 하는 모든 이를 지칭한다.)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억압과 피억압,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됐을까? 하지만 지금 사회는 좀 더 복잡해져서, 이념이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간, 즉 '을'과 '을'의 대립이 더 피부에 와닿게 됐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진보 노조'와 '보수 노조', '편의점 사장'과 '아르바이트생'...


오늘날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념', '빨갱이', 툭하면 파업을 일삼는 '과격한 노조의 한물 간 이데올로기' 정도로 치부되지만, 공산주의는 20세기를 뒤흔들고 우리에게 커다란 역사적 유산을 남겼다. 미래의 사회는 '플랫폼 혁명'이 지배할까? 노동은 '로봇'과 'AI'로 대체되는 세상이 올까? 아니면 '사회민주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할까? 19세기 노동자들의 투쟁을 촉구했던 마르크스가 현대의 사회를 보면 어떤 진단을 내릴지 궁금해진다.


프롤레타리아가 공산주의 혁명으로 잃을 것이라고는 쇠사슬뿐이다.
그들에겐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앵겔스


* 인용된 <공산당 선언> 한글 번역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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