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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프로 Dec 21. 2020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능력주의의 한계

트럼프의 당선, 그 이후에 미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들이 미국 지식인 세계에 던진 충격은 엄청났던 모양이다. 마치 내가 평생을 알아왔고 사랑해왔던 사람이, 어느 날 내가 알던 모습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느낌이랄까? 내가 살고 있는 조국(미국)의 전혀 다른 모습을 마주한 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역시 그랬다.


대체로 이런 현상을  세계적 '포퓰리즘'(우리는 주로 '퍼주기' 한정해 쓰고 있지만, 대중영합주의가 정확) 현상과 연계해 분석하고 있지만 마이클 샌델은  다른 요인이 있음을 주장한다. 그중 첫 번째 진단(이는 '에이미 추아' ‘정치적 부족주의’로 대표된다) 대한 샌델의 평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진단은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의 분노가 주로 인종적, 민족적, 성적 다양성의 꾸준한 증대에 대한 반동이라고 보고 있다. 사회 위계질서의 상층부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백인 남성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소수자로 밀려나는 일’, ‘고향에서 이방인이 되는 일’이 두려운 나머지 트럼프에게 표를 던졌다는 것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센델  


능력주의가 불러온 반발


마이클 샌델은 이른바 '엘리트'들의 책임과, '정치적인 잘못'에 대한 분석이 빠져 있음을 지적한다. 그 ‘잘못’이란 바로 '능력주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좌든, 우든 이제 시장 메커니즘에 대해 부정하기 어렵다. 좌파*라 해도 경제 권력을 통제하기보다는 좀 더 '기회의 평등'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 진보나, 보수, 자유주의 등 여러 표현 방법이 있지만 이 글에선 책과 같이 '좌파'와 '우파'를 주로 쓴다.)


이 기회의 평등이 곧 '교육'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누구나 출생이나 특권이 아닌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을 스스로 이뤄낼 수 있다는 믿음이 ‘아메리칸드림’의 실체가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교육을 통해 권력을 쥐게 되면 자신들의 성공은 누구의 도움도 없는, 오직 자신만의 능력으로 얻어진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노력과 재능의 힘으로 능력 경쟁에서 앞서 가는 사람은 그 경쟁의 그림자에 가려 있는 요소들 덕을 보고 있다. 능력주의가 고조될수록 우리는 그런 요소들을 더더욱 못 보게 된다. 부정이나 뇌물, 부자들만의 특권 따위가 없는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런 결과를 해냈다’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준다. 명문대 입학을 위해 요구되는 여러 해 동안의 노력 역시 그들이 ‘나의 성공은 나 스스로 해낸 것’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다. 그리고 만약 입시에 실패하면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자기 자신의 잘못’이라는 인식도 심어주게 된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센델  


이러한 능력주의에 따른, 이른바 엘리트들의 우월하다는 인식은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됐던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이 사례에서 느꼈듯이.. 좌파, 내지는 중도우파들이 '아메리칸드림'을 말하고, 치열한 경쟁에 승리한 전문 엘리트들을 칭송할 때, 소외된 노동 계급들은 좌절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포퓰리스트'들이 손을 내민다.


피케티는 좌파 정당들이 노동자 정당에서 지식계급, 전문직업인 정당으로 탈바꿈한 것이 왜 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본다. 한편 높은 학력을 못 가진 사람들은 엘리트가 밀어붙이는 세계화에 반발하고 포퓰리스트, 국수주의자 후보들에게 표를 던졌다. 미국의 트럼프나 프랑스의 민족주의-반이민 정당을 이끄는 마린 르펜 같은 사람들에게 말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센델  


기회의 평등 vs. 평등한 사회


포퓰리스트의 등장 원인에 대한 '두 번째 분석'은 세계화와 기술 혁신에 대한 것이다. 잠깐 영화 얘기를 하자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그란 토리노'에선 미국 블루 칼라 백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평생 공장에서 일한 보수 꼰대(?)지만 은퇴 후 어느 정도 삶의 여유도 있고, 애국심과 정의감도 살아 있는 전형적 '미국인'(물론 예전 기준으로)이다.


하지만 세계화와 기술 혁신으로 '노동'을 별 가치 없는 것으로 돼버리고, '자본'의 가치만 끝없이 높아진다. 이제 블루 칼라들은 오일쇼크 이후 배기량만 높아 버림받은 '그란 토리노'처럼 퇴역 고물 신세가 된다.

그란 토리노 : 중형차 라인임에도 최소 4,000cc 이상인,  백인 노동자에게는 미국 황금기의 로망이다..


노동이 대안이 아닌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불운한 이들의 유일한 기회는 역시 '교육' 뿐이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이란 진흙(흙수저) 속에서 '진주'를 찾아내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지, 모두가 노력하면 진주가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정말 지금 기회가 평등한지와 별개로, 설령 기회가 평등해졌다고 해서 결과가 평등한 세상이 온다는 것은 착각이며 허황된 믿음이다.


우리는 흔히 '노력''능력'을 혼동하여 사용한다. 마치 '틀렸다'와 '다르다'를 헷갈리는 것처럼... 노력을 했다고 성공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내가 가진 능력이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니거나 희소성이 없을 수 있으니까.. 노력은 성공의 필요조건인 것은 분명하지만, 충분조건은 절대 아니다.


두 번째로,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또한 행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르브론 제임스는 매우 인기 있는 스포츠인 농구를 하며 수백만 달러를 벌었다. 탁월한 운동 재능을 가진 것 말고도, 르브론은 그 재능을 가치 있게 여기고 보상해주는 사회에서 산다는 행운을 누렸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은 승자에게는 자만심과 교만함을, 패자에게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노력을 하지 않아서라는 좌절감과 사회적 꼬리표를 안겨준다.



소비의 정체성과 생산의 정체성. 


내 경우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은 분이라면,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쉽지 않을 듯싶다. 이미 기존의 책에 나온 내용들이 다시 반복되며, 이 책에서도 도돌이표처럼 나의 성공은 '행운'의 결과이며, 누군가의 실패도 마찬가지임을 깨닫고 겸손해져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 책의 클라이맥스는 책의 후반에 있다. (끝까지 읽을 자신이 없다면 1장에서 곧바로 7장으로 넘어가는 것도 방법) 그전까지 다소 이상적인 제안들을 조심스럽게 던지던 샌델은 7장부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간다. 그는 진보가 능력주의에 전도되어 임금 정체, 아웃소싱, 불평등, 이민자와 로봇의 일자리 빼앗기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대학에 가서 승리하라는 주장만 늘어놓은 결과 부메랑을 맞았음을 상기시킨다.


이것은 글로벌, 능력주의적, 시장 주도적 시대의 관념론이다. 승자에게 아첨을, 패자에게 모욕을 던지는 관념론. 2016년 그 환상은 끝장났다. 브렉시트 가결과 트럼프 당선을 맞이하여, 그리고 유럽의 초극우 민족주의, 반이민 정당들을 보며 그 프로젝트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음을 고해야 한다. 이제 문제는 그 대안적인 정치 프로젝트가 어떤 것이냐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우리나라에서도 발생하는 역설이지만, 왜 진보의 논리에 혜택을 입을 수 있는 저소득층은 보수를 지지할까? 일반적으로 진보는 '스마트'함을 추구하고. 우둔함을 경멸한다. 진보는 노동자들에게 실질적 혜택인 복지로 손을 내밀지만, 노동자들은 단순히 금전적인 혜택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게 센댈의 주장이다. (역으로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샌델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학자답게, 세계화로 인해 소비자 복지만 우선시되는 상황을 우려한다. 중국이나 다른 더 저렴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나라에서 생산된 물건을 수입하면 소비자 이익은 강화되지만 생산자들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때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에게도 그들이 필요 없는 존재라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끔, 사회적 공동선에 그들이 기여하고 있다는 존중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노동계급과 중산층 가정의 구매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곤경을 보상하려는 정책 대안, 또는 사회적 안전망 강화를 도모하는 정책 대안 등은 지금 한창 불붙고 있는 분개와 분노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이는 그 분노가 사회적 인정과 명망을 잃은 것과 관련되어 있어서다. 구매력의 저하도 분명 문제지만, 노동계급의 분노를 직접 촉발한 상처는 그들이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이다.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그럼, 세계화는 왜 능력주의에 따른 양극화를 부추기는 걸까? 제조 공장처럼 인건비 편차가 큰 반면 결과물에 별 차이가 없는 영역은 조금이라도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서 빠져나가지만, 부가가치가 높은 혁신 산업은 인프라가 중요하기 때문에 실리콘밸리 같은 곳으로 더 몰리게 된다. 이곳은 엄청난 부동산 비용과 인건비를 부담해야 하지만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다. 미국의 경우, 금융과 IT가 집중된 해안가는 점점 부유해지고, 중부 내륙의 이른바 '러스트 벨트'는 점차 몰락하는 길로 가고 있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같은 논리로 중국의 위기를 설명하는 분석도 있는데.. 중국 내 노동자의 인건비의 상승에 따라 빠져나가는 해외로 제조업을 고학력의 인프라로 대체하지 못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미국보다는 상대적으로 제조업의 기반이 강한 우리나라의 경우, 이런 블루 칼라의 상실감이 상대적으로 크게 다가오진 않지만, 한때 조선업이 불황으로 인해 울산의 황량한 모습이 연일 보도되던 모습을 생각하면, 제조업 전반에 이런 문제가 닥쳤을 때의 충격이 어느 정도일지.. 왜 미국 사회가 이렇게 변했는지를 대략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마이클 샌델은 결국 공정의 문제 역시 '정치'로 풀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관성이 강해지며 빈익빈 부익부는 가속도가 붙는다. 이를 통제하려면 강력한 정치적 힘이 필요한데, 이는 결국 어떤 기준으로 분배할 것인가, 그것이 과연 공정한가의 문제를 만들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닌, 특정한 정권의 보이는 손이 인위적으로 조정할 때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이 '기본 소득' 같은 직접적인 것이든, 재벌이나 언론, 검찰, 의료 분야 같은 기득권에 대한 것이든, 증세에 대한 것이든.. 우리는 이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상속세와 큰 상관이 없음에도 재벌의 과도(?)한 상속세를 걱정하고, '투쟁'을 하는 노동자 대신 사업주의 이익을 걱정해주는, 아직 능력주의를 금과옥조로 여기는- 우리는, 기술의 물결이 블루 칼라를 넘어 화이트 칼라까지 덮쳐 와서, 우리의 '능력'이 무용해졌을 때도 역시 초연할 수 있을까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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