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마케터는 베끼고, 위대한 마케터는 훔친다.
생전에 스티브 잡스는 삼성의 갤럭시를 카피캣이라 맹렬히 비난했었죠. 한때 두 회사 간의 소송전도 대단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잡스 역시 그렇게 카피캣을 비난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맥킨토시(커버 이미지)를 처음 출시할 때 '팔로알토 연구소(PARC)'에서 마우스와 GUI를 베껴 왔거든요.
어쨌든.. 맥은 지금도 창작자들의 상징으로 남아 있고, 갤럭시 역시 애플과 점유율 1위를 놓고 다툼을 하고 있죠. 도덕적으로는 좀 비난받았을지 모르지만 카피 전략은 나름 성공한 셈입니다.
개인적으로 야구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야구 관련 작품들도 좋아하는 편인데, 얼마 전 '스토브리그'라는 드라마를 다시 봤습니다. 다시 보니 처음 볼 때보다 카피캣(?)의 흔적이 더 또렷하게 보이더군요.
드라마의 기본적인 틀은 영화 '머니볼'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이동진 평론가가 '최고의 야구(소재) 영화'라고 별 넷을 준 작품이죠. 스토브리그에 등장하는 '드림즈'라는 팀의 유니폼이 '오클랜드 애슬래틱스'(머니볼)와 거의 흡사한 것을 보면 제작진도 숨길 생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머니볼 역시 실화 배경이라 영화가 아닌 실제 애슬래틱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머니볼은 빌리 빈이라는 단장이 세이버 매트릭스를 도입해 망해가는 팀을 우승까지 도전시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스토브리그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스포츠 드라마 답지 않게 선수들이 아닌 단장(GM)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야구 경기가 열리는 시즌이 아닌 비 시즌(스토브리그)의 이야기를 다루죠.
그리고 또 하나, 국내에서 잘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루즈벨트 게임'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있습니다. '한자와 나오키'로 잘 알려진 이케이도 준의 소설이 원작이구요. 이 드라마는 사회인야구팀*의 이야기입니다.
* 일본의 사회인 야구는 주로 일반인들이 취미로 하는 우리나라 사회인 야구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준 프로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던 실업팀과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루즈벨트 게임이라는 드라마의 주요한 축은 야구팀의 해체를 둘러싼 갈등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도 드라마 스토브리그와 유사하죠.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이건 직접 확인)
이렇게 보면 스토브리그는 '머니볼'에서 배경 요소(단장의 시간)를 가져오고, '루즈벨트 게임'에서 갈등 요소를 가져온 뒤, 국내 야구계에서 실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버무려서 만든 작품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죠.
이 글의 목적은 국내 드라마의 창의성 부족이나 표절을 성토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스토브리그는 꽤 잘 만든 드라마죠. 제가 하려는 이야기의 핵심은 '카피캣(?)'이 왜 성공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엔 '아이폰'을 스마트폰의 시초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꽤 많지만.. 그전에 '블랙베리'라는 제품이 이미 스마트폰의 대명사였죠. 블랙베리는 지금과 달리 일반인들이 모두 쓰는 것이 아닌, 진짜 업무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블랙베리의 특징은 물리적 키보드에 있었죠. 주 용도가 메신저와 이메일이다 보니 이런 형태의 키보드가 정확성이 높았거든요. 사실 폰 자체가 스마트하다기 보다, 스마트한 사람들이 쓰는 특화된 용도의 폰에 가깝습니다.
그럼 터치 스크린 기술은 없었느냐? 아닙니다. 스마트폰 한참 전에 이미 PDA가 있었고, 피쳐폰에서도 터치스크린이 적용된 제품들이 있었죠. 물론 당시엔 스타일러스를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블랙베리나 나중에 나온 PDA 역시 물리적 키보드를 채택한 것은 정확성 때문입니다.
아이폰은 물리적 키보드의 정확성에 터치 스크린의 편리성을 더한 제품입니다. 두개의 장점을 믹스한 거죠. 단순히 합치는 건 쉬워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절대 아닙니다. 원천 기술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거죠. 그 전의 터치는 물리적인 방식이었는데 이걸 정전기 방식으로 바꿉니다. 두 손가락을 동시에 쓰는 것도 이때 가능해지죠. (당시 이걸 처음 본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그리고 제품 자체의 활용성을 높였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스마트폰은 업무용이라는 인식을 깨고,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를 대폭 강화해서 일반 대중들이 열광하게 만든 거죠.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공개한 프리젠테이션을 떠올려 보죠. 아래 사진과 같이 iPod과 인터넷 서핑이 통합되었다는 걸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후 성능이 업그레이드되고 서드파티 개발사들과 협업이 강화되면서 영화나 게임 등을 지속적으로 추가하구요.
비슷한 현상은 아이패드가 출시될 때도 발생합니다. 이미 한참 전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출시했던 업무용 태블릿이 있었지만 처참히 실패했죠. 그래서 애플이 태블릿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 때 전문가들 대부분은 실패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나름 IT 덕후였던 저 역시 아무리 애플이라도 태블릿은 좀.. 생각했었죠.
애플라고 태블릿에 더 혁신적인 기능이 들어갈 게 있을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잡스는 역시 활용성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이미 성공한 아이폰의 공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거기에 아이패드의 장점, 즉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는 모습들을 보여주죠.
성공의 공식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무기가 되는 스토리라는 책에는 스토리에도 공식이 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화나 드라마는 대체로 비슷한 패턴을 갖고 있다는 거죠.
거의 모든 스토리를 아주 압축적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무언가를 원하는 어느 ‘캐릭터’가 ‘난관’에 직면하지만 결국은 그것을 얻게 된다. 절망이 절정에 달했을 때 ‘가이드’가 등장해 ‘계획’을 내려주고 ‘행동을 촉구’한다. 그 행동 덕분에 ‘실패’를 피하고 ‘성공’으로 끝맺게 된다. -
무기가 되는 스토리 - 브랜드 전쟁에서 살아남는 7가지 문장 공식, 도널드 밀러
이 책에선 이 공식의 다양한 예를 듭니다. 스타워즈, 헝거게임 등등..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흐름이 존재하죠. 어차피 영화나 마케팅이나 똑같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니까요.
위의 제목(위대한 마케터는 훔친다)은 피카소의 말을 흉내 낸 것입니다. 원문은 '마케터'가 아니라 '예술가'죠. 좋은 예술가는 베끼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는데, 베끼는 것과 훔치는 것의 차이는 뭘까요? 그 작품 자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그 아이디어를 내 것으로 만드는 거죠.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캐치하고, 여기에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요소를 추가로 넣는 것이 화룡점정이 되죠. 빌 게이츠가 잡스가 훔친 GUI를 다시 훔쳐서 좀 더 대중적인(어느 컴퓨터에서나 쓸 수 있는) 윈도우를 만들고, 스토브리그가 야구 드라마(영화)의 성공 패턴에 한국 야구의 특징을 접목시킨 것처럼요.
위에서는 같은 업종에서의 카피캣 사례들을 들었습니다. 컴퓨터나 콘텐츠 업계 안에서의 이야기죠. 하지만 이런 카피는 벌써 누군가 따라 했거나, 따라 할 만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쉽지 않다는 얘기)
그럴 땐 시야를 좀 더 넓혀야 합니다. 우리 비즈니스와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분야까지 살펴볼 줄 아는 관찰력이 필요합니다. 이게 창의성이에요. 예를 들어 유니클로의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는 '사업을 한다는 것'의 추천사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아래의 '그'는 맥도날드의 창업자 레이 크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당시 그가 요식업 전문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외부자의 객관적인 눈으로 사업의 장래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재능일 것이다.
레이 크록은 사실 내 은인이기도 하다. (중략) 더불어 레이 크록이 주장한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는 패스트푸드의 개념에 자극받아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 입을 수 있는’ 의류 체인을 만들자는 구상을 했다
사업을 한다는 것, 레이 크록
원래 레이 크록은 멀티 믹서를 팔던 사람입니다. 맥도날드 형제는 그 멀티 믹서를 사는 고객 중 하나였죠. 그는 정작 맥도날드 형제조자 잘 몰랐던 성공 방정식, 즉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이라는 패스트푸드의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이걸 발견하는 데는 굳이 요식업 전문가일 필요가 없었죠.
그리고 야나이 다다시는 이러한 F&B에서의 성공 방정식이 패션 업계에도 통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니클로의 핵심 가치인 '라이프웨어'가 탄생한 거죠. 유니클로의 회사 이름도 패스트 리테일링이 되구요. 레이 크룩과 맥도날드의 아이디어를 훔친(?) 거죠.
사람들이 트렌드를 궁금해하는 것은 요즘 먹히는 게 뭐야?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일 겁니다. 하지만 정작 트렌드의 이면에 숨은 소비자 심리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만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경우는 더 많구요. 지금 우리가 훔칠 가치가 있는 성공 방정식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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