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 내 의지로 몸에 입히고자 향 제품을 구입한 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내 또래의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던 지하상가의 화장품 가게에서 홀린 듯 집어왔던 것 같다. 스킨 푸드의 ‘이탈리안 레몬 샤워 코롱’. 레몬, 유자, 자몽, 허니서클 등의 향이 모여 상쾌한 아침 공기의 내음을 표현했다고 하는 아주 가볍고 해맑은 코롱이다. 차가운 겨울날 내 맘을 잡아 끈 향 치고는 한여름에나 어울릴 법한 냄새였다.
그 무렵 엄마는 항상 무겁고 진한 향수를 사용하셨다. 그 이름도 유명한 샤넬 넘버 5의 보디로션은 항상 안방 욕실 주변에 굴러다니곤 했다. 일랑일랑과 재스민, 그리고 사향이 혼합된 향의 기억은 중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색에 비유하자면 검은색과 짙은 자주색이 떠오르는 향기였는데, 레몬 향을 골랐던 내 취향과는 간극이 컸다. 엄마의 취향으로 가득 찼던 집안을 보며 나도 내 마음에 쏙 드는 무언가를 모으고 싶다는 갈망이 생겼던 것 같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이미지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첫 코롱을 구입한 후 용돈이 허용하는 선에서 닥치는 대로 저렴한 향수를 사 모으게 되었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더 심했는데, 매일 정해진 교복과 자습을 위한 편한 옷만을 입다 보니 몸에서 특별한 향이라도 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각종 소셜 커머스에서 최저가를 비교해 눈독 들였던 향수나 보디 미스트를 주문하는 것은 입시 생활 중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친구들에게 어울릴 법한 향을 찾아 선물하는 것도 기쁨을 주곤 했다.
대학 입학 후에도 동기들은 내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향만으로 알아차릴 때가 많다고 말했다. 습관처럼 곁에 머무르기 때문에 내 후각에는 무뎌졌지만, 하루 종일 나와 붙어 있는 것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는 꽤 강하게 인식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여러 제품을 돌려가며 사용하는 것보다 나의 정체성이 되어 줄 하나의 향기를 찾아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던 중 만나게 된 것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었다. 이탈리아의 싱그러운 여름을 가장 자연스러운 미장센으로 풀어낸 영화가 아닌가 싶다. 풀밭을 뒹굴며 나무에서 바로 따온 과일을 베어 먹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근처 물가에 풍덩 뛰어드는 엘리오와 올리버. 뜨겁고 시원한 여름의 서사를 완벽히 녹여낸 장면 하나하나에 매료되어, 나는 영화가 주는 여운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나흘간 집에서 도보 15분가량 걸리는 영화관까지의 거리를 조조와 심야 시간대로 하루 두 번 편성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러 바지런히 걸어 다녔다.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따사로운 청춘의 기분에 진탕 빠져버리고 싶었다.
일주일 간 한국에서의 짧은 휴식을 보내고 다시 홍콩에서 나를 기다리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행여나 항공편을 놓칠까 불안한 마음에 언제나처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일찍 공항에서 수속을 끝낸 참이었다. 시간을 때우려 공항 면세 구역을 설렁설렁 둘러보다 엘리자베스 아덴의 ‘그린 티 미모사’ 향수를 발견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하던 그린 티 라인의 향수라 궁금한 마음에 시향 해보았다. 놀랍게도 내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관람하며 상상했던 향기와 분위기가 그대로 표현된 듯한, 상큼하고 자연스러운 풀꽃 내음이 생생했다. 향의 중심을 잡는 미모사 꽃 향과 시칠리안 레몬, 그린 티, 자몽 등의 향이 어우러져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하게끔 하는 향이었다.
재미있는 점은 내가 정착하고자 마음먹은 이 향기가 열다섯 살의 내가 고른 향과 분위기가 매우 흡사하다는 점이다.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이 쉽사리 변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두 향기 모두 여름날의 더위를 상쾌하게 중화시켜 주면서도 자연물 본연의 향과 괴리가 없다는 점,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감귤류 향이 풍부하게 전해진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살벌한 무더위와 물속을 걷는 듯한 습기 탓에 여름이란 계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나이지만, 그 계절만이 가져다주는 잔상과 분위기만큼은 동경하지 않을 수 없나 보다. 때때로 일상이 무기력해지는 날에, 여름의 냄새가 듬뿍 묻어나는 향수를 입고 한여름처럼 생기 가득한 마음을 되찾아 보는 것도 산뜻한 행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