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낮이 더 어둑해질 무렵까지 빈둥대다 느지막이 외출 채비를 했다. 오랜 친구를 불러내 언젠가 한 번 방문하리라 벼르고 벼르던 소품 가게에 갔다. 70년대의 빈티지 조명들부터 다양한 모양의 유리잔들, 자잘한 공예품들을 둘러보며 눈요기를 했다. 공간에 어울리는 향과 음악이 더해져 카니발의 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갑 사정이 좋지 못한 관계로 애초에 물건을 구입할 생각은 접어두고 방문했으나, 미래에 사회인이 되어 금전적 여유가 생기면 다시 들러 마음에 드는 소품을 하나 사고 싶다며 친구와 함께 다음을 기약했다.
가게 문을 열고 향이 피어나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가 오랜만의 가을비로 촉촉해진 거리에 발을 디뎠다. 사람 얼굴보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들이 축축한 모양새를 띠며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나뭇잎의 행적을 따라 걷다 문득 또래의 여성분들이 도란거리는 소리에 쳐다본 골목길에는 보송한 아기 고양이가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밤처럼 새까만 털을 가진 예쁜 아이였다. 잠시 멈춰 흐뭇한 표정으로 고양이를 바라보다 어두운 길가를 은은히 밝히는 작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습관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친구를 기다리다 문득 오늘이 주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주문을 바꿨다. 카페인이 급하게 몸으로 흘러들지 않는 카페라테로. 500원만 더 드리면 된다는 사장님의 말씀에 자신의 카페모카를 현금으로 계산하고 500원을 거슬러 받은 친구가 다시 동전을 돌려드리며 웃었다. 자리로 돌아와 음료를 기다리는 동안 지갑에서 주섬주섬 500원을 찾아 친구에게 쥐여 주었다.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동전을 받는 모습에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보내는 주말이 참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가 바깥쪽에 놓인 야외 좌석에는 캣닢을 담은 플라스틱 통이 놓여있었다. 지나가는 길냥이들을 위한 깜짝 선물인 걸까. 따뜻한 마음을 안고 라테를 들이켰다.
저녁 7시가 넘도록 한 끼도 먹지 않은 친구를 데리고 연남동 방향으로 걸어갔다. 언제와도 사람이 많은 연트럴파크를 보며 조금 질색하다 먹고 싶은 메뉴가 근처에 없어 사람이 더 많은 홍대 입구 쪽으로 가기로 했다. 우리 둘 다 전날 썩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인지, 자극적인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에 마라샹궈 집으로 향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취향이 같아 야채와 두부만 한 사발 담은 샹궈를 집어먹으며 주린 속을 달랬다. 아니, 괴롭힌 건가. 요리와 함께 주문한 장미 차 음료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친구와 기쁜 눈빛을 주고받았다. 한참 젓가락을 움직이다 남은 라테를 마라와 번갈아 가며 먹어보았다. 조합이 굉장히 안 어울려 작게 웃음을 뱉었다.
빈속에 짜고 매운 마라를 채워 넣어서인지 갈증이 심한 입안을 정리해 줄 무언가 필요했다. 홍대 거리에 심심치 않게 보이는 과일 탕후루를 골랐다. 냉동실에서 방금 꺼내온 건지 차가운 설탕과 속에 든 청포도가 시원하게 입가심을 도왔다. 너무 많이 먹은 것 같다며 배를 통통 두드리며 하늘을 올려보니 어제 오랫동안 보지 못해 아쉬웠던 달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달 토끼가 선명한 보름달을 따라 터벅터벅 다리를 움직였다.
도착한 곳은 친구가 좋아하는 배우분이 운영하시는 서점 겸 카페. 짙은 초록색의 인테리어와 나의 취향에 들어맞는 책들이 가득한 서가가 눈을 사로잡았다. 수다 떠는 이 하나 없이, 책장 넘기는 소리만 간간이 들리는 공간이 안락했다. 매운 속을 달래기 위해 따뜻한 루이보스 차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친구가 내 주문을 듣지 못하고 똑같이 루이보스 차를 주문하는 것을 보았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신기해하며 읽고 싶은 책 두어 권을 골랐다. 맵고 달고 향긋한 액체들이 혼합되어 출렁이는 속을 천천히 꺼뜨리며 책장을 넘겼다. 마음껏 가져가서 먹어도 괜찮다고 적힌 귤 바구니에서 꺼내 온 초록 이파리가 달린 귤 하나를 옆에 둔 채. 결국 귤은 먹지 못해 다시 돌려두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퇴근 시간이 아닌 막차 시간의 지하철에 친구와 함께 올랐다. 같은 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한주가 시작될 월요일을 걱정하고 있었을까? 겨울에 가까워지는 요즘 점점 짧아지는 해 때문인지 보고 걷고, 또 먹고 걷는 동안 한밤을 꼬박 지새운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대신 은은한 달빛과 점점 깨끗해지는 공기의 냄새에 취해 발길 따라 걸은 밤이 참 좋았다. 피로에 절어 급하게 의식의 스위치를 꺼버리는 밤이 아닌, 어둑한 거리의 정취를 음미할 수 있는 밤들의 수가 조금은 늘어났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