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어 사전3
최근 자주 드는 생각은 ‘옳고 그름’보다 ‘아름다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 좋은 의도로 한 일이 최선의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를 종종 겪는다. 좋은 의도를 가장하는 경우는 논외로 하더라도, 가끔 이해되지 않는 가까운 이들의 행동이 단순히 내 기분을 살피느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색한 배려일 때가 있다.
우리는 흔히 어린 자녀가 삐뚤비뚤한 글씨로 적어 내려간 “엄마 사랑해”라는 편지에 깊이 감동한다. 맞춤법이 틀려도, 종이가 구겨져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순수한 본심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고, 서툰 방식으로 자기주장을 하거나 실수를 저지르면 우리는 갑자기 매정한 판사가 된다. 아이의 행동이 ‘맞느냐 틀리느냐’를 따지느라, 그 저변에 깔린 성장의 진통이나 여전히 간절한 애정의 갈구를 놓치고 만다. 본질을 수용한다는 것은, 아이의 글씨체가 아니라 아이의 마음을 보았을 때처럼 그가 처한 상황과 존재 자체를 긍정해 주는 일이다.
마음을 표현하고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푸는 데 정해진 답이 어디 있겠는가. 가끔은 그 표현이 미숙하고 촌스러울지라도, 그 안에 담긴 본질을 발견해 내는 것이 수용의 시작이라 생각한다.
수용의 아름다움은 부부 관계에서도 절실하다. 배우자의 모든 행동이 내 마음에 쏙 들 수는 없다. 어떤 날은 입 짧은 그가 야속하고, 어떤 날은 정리 정돈 못 하는 그의 습관이 눈에 가시처럼 박힌다. 예전의 나라면 그것을 ‘고쳐야 할 오답’으로 보고 날 선 말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자람을 그저 ‘그 사람의 풍경’으로 받아들인다.
완벽하지 않은 그의 모습은 완벽하지 않은 내 모습과 같다. ‘저 사람의 저런 면을 내가 고쳐놓고 말겠어’라는 생각은 실현 불가능이다. 싸움 밖에 안된다는 건 해보면 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격적 오점이라면 헤어지는 게 맞겠지만, 나의 부족함을 누군가 수용해 주길 바라는 만큼 나 또한 상대의 모자람을 넉넉히 받아주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하는 태도다. 누군가를 내 기준에 맞게 만드는 게 아니라, 부족하고 어설픈 그 모습 그대로가 내 삶에 들어와 하나의 그림이 되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수용은 상대의 결점을 묵인하는 인내가 아니라 타인이 내미는 투박한 진심과 그가 가진 인간적인 틈을 내 공간에 들여놓는 환대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날카로운 교정지가 아니라 넉넉한 캔버스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내려놓고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자. 서툴고 어리숙해도 그 자체로 귀엽지 않겠는가. 나와 함께하는 이들을 수용하는 것은 내 삶을 내가 기꺼이 받아들이는 겸손이다.
내 안의 엄격한 판사를 은퇴시키고, 그 자리에 다정한 예술가를 앉히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