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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an 23. 2018

20160412 트럼보

폭력적인 시대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한 투쟁

2016.04.12 (화) 심야


 이날은 뭔가를 마감하고 있었다. 마감을 시원하게 하고 난 후 영화로 머리를 식혀야지! 하고 생각한 나는 영화시간에 맞춰 작업을 끝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12시 25분 영화를 12시 35분에 들어가는 불상사를 겪게되었다. 뭐 앞에 광고 많았을테니까... 거의 처음부터 봤을거야... (라고 심심한 위로를...) 마감을 간신히 끝내고 작가 이야기를 보러 영화관에 들어가서 트럼보가 자꾸만 작품을 마감하는 경이로운(악몽같은) 작품을 봤다. 그는 대단하다.  


 영화는 간단하게 이런 내용이다. 1940년대 미국.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나타난 매카시즘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반공산주의 바람에 휩쓸려 작가 트럼보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랐다. 그탓에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한순간 모든 것을 잃고만다. 그는 그래서 여러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한다. 11개의 가짜이름. 그리고 2번의 아카데미상 수상! 그 뒤에는 모두 트럼보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로맹가리가 생각난 건 나뿐인가...) 


 나는 실화를 다룬 이야기들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관심이 많다. ‘사실’과 ‘픽션’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 타기를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사실’을 너무 추구하다보면 ‘재미’를 잃게 되고, 재미를 위해 ‘픽션’을 추구하다보면 사실을 ‘왜곡’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조금만 잘못해도 실제인물과 그와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힐 수 있으므로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이 이야기를 하고자 했을때는 어떤 사명감.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꼭 해야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신념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한 인간. 그리고 그런 시대에 희생당한 한 천재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동료, 소설가인 트럼보를 통해 감독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예술의 자유. 사상이 예술을 지배할 수 없음. 나아가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나에게는 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부조리한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찾아가는 천재 괴짜작가의 이야기로 읽힌다. 자아찾기, 즉, 시대와 국가가 빼앗아간 나를 찾는 유.쾌.한.싸움! 여기서 방점은 유쾌한에 찍힌다. 이야기는 충분히 우울하고 우중충하고 절망적이다. 그런데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유머와 풍자로 가득 차 있지만 씁쓸하다. 왜 시대는 한 인간이 인간답게, 가장 자신답게 살고 싶어하는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벌하려 할까, 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믿는 것이 불법이라고 치부할까. 뭐 어쨌든 그는 그런 현실과 싸워 이겼고 결국 자신(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너무 많은 희생을 치뤘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승리했지만 상처 가득한 승리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면, 이후엔 그 싸움을 함께한 잃어버린 것들을 위한 싸움으로 변해간다.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점점 그가 지키려고 했던 ‘사상’ 보다 ‘동료와 가족(사람)’들이 그의 싸움이 원동력이 된다. 트럼보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글로쓰면서, 그저 행복하게 살고싶었던 인간이었을 뿐이었을텐데 말이다. 시대가. 사회가. 사상이. 그를 투쟁하는 인간으로 만들버렸다. 


 트럼보에게 사상(신념)이란 무엇이었을까? 자신을 파멸시키고, 가족과 동요를 희생 할 만큼 큰 가치였을까? 아니, 아니, 아마 그에게 사상이란 ‘자기 자신이 믿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고 그것을 지켰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지킴으로 모든걸 잃는다. 그는 그럼에도 당당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싸운다. 나는 ‘폭력’이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음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저것 중 하나가 아니라 이것밖에 선택할 수 없는 현실, 그 시대가 그러했던 것 같다.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던 시대. 그런 시대에서는 금기시 된 것을 ‘감히’ 말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은 늘 시련을 겪는다. 왜냐하면 시대가 폭력적이란 걸 아는 미친사람들 사이에 있는 정상인이기 때문이다. 시대는 그런 정상인을 불편해했고 그랬기에 트럼보에게 너무나 폭력적이었다. 그러다 문득, 작년 한 선생님이 겪었던 예술검열 사건이 떠올랐다.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영화를 보며 예전에 보았던 연극대사가 떠올랐다. “역사란 좆같은 일 뒤에 또 좆같은 일이 일어나는 거야.” 그런 시대가 와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흘렀고, 시대가 변한다. 트럼보는 긴 싸움을 끝내고 다시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대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똑같이 피해자라고, 그 자리에 있던 그의 가족과 그를 배신했던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들은 모두 알았던 것이다. 결국 이 고집불통 아저씨가 승리하였음을, 그리고 그 싸움이 가치로웠음을!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난다. 


 영화에서 트럼보는 자존심이 상할법한데도, 별거아닌 제작사에서, 거지같은 글을 써달라고 할 때도 혼쾌히 승낙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작가라 쓰레기라도 쓰지 않으면 굶어요.” 그런 그가 자신때문에 폐암에 걸렸음에도 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함께하는 동료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그 동료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똑같이 할거야.” 나는 이 영화에서 완벽한 작가와 완벽한 위로 하나를 얻었다.   



 

p.s.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자꾸 내 선생님 한분이 생각났다. 외모와 성격이 너무 닮아서... 애들이랑 새벽까지 같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기타를 퉁기고, 노래하고, 우시는 분. 내가 힘든일이 있었을때 ‘그래 슬퍼하는 건 좋은데 말이다, 몸 상할만큼 슬퍼는 말아라’고 말씀해주셨던 멋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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