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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an 23. 2018

영화_패터슨

쓴다는 행위는 가끔 어떤 인생을 구하기도 한다.


 여기 한 버스 운전사가 있다. 그는 매일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그는 정해진 시간을 노동한다. 중간에 잠시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는다. 그리곤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한 후 아내와 여느 때처럼 저녁을 먹고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든다. 그리고 휴일에는 쉬거나 외출을 하거나 외식을 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버스 운전사가 있다. 그는 매일 6시에서 6시 30분 사이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출근한다. 그는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에서 이런저런 사색이 잠긴다. 그는 버스 운전을 하기 전에 자신의 머릿속을 스쳤던 단상들을 자신만의 시노트에 기록한다. 그는 정해진 시간을 노동한다. 그 노동의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다 중간에 잠시 아내가 싸 준 도시락을 먹는다. 매번 바뀌는 도시락 메뉴와 도시락통에 붙여져 있는 매번 다른 아내의 사진을 본다. 그리곤 정해진 시간에 퇴근을 한다. 아내는 오늘도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는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지하 작업방에 틀어박혀 또 기록한다.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다 잠자리에 든다. 아내는 휴일에 있을 바자회에서 케이크를 팔 생각에 잔뜩 들떠 있다. 그의 아내는 아마 휴일에 바자회에서 케이크를 팔 것이며 그는 오랜만에 혼자만의 주말을 보낼지도 모른다. 


 그래. 이렇듯 그저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과 시인의 꿈을 갖고, 혹은 밴드 보컬이 되고 싶은 꿈을 갖고 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은 겉으로 보기엔 같은 일상을 살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은 사실 전혀 다른 것이다. 가끔 너무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이. 직장이 내 꿈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가 있지만 패터슨은 그런 걱정을 말끔하게 날려준다. (그는 딱히 자신의 행위가 ‘예술’ 임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지만) 우리의 일상은 시가 될 수 있고, 우리 모는 모두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예술가다. 자각하지 못할 뿐. 여기에서 예술. 예술. 하는 것이 사실 좀 어색하기도 하다. 패터슨은 그저 자신의 일상에서 숨구멍을 찾았고, 그것이 시였으며, 그걸 즐겁게 했을 뿐이었는데 그것을 예술이라 칭하니 뭔가 과도한 숭고함이 덧입혀진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한 나만의 글쓰기. 패터슨은 시를 쓰는 행위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많은 부분에선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쓴다는 행위에 큰 위로를 받았을 터다.


 나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나는 전공을 살려 연극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자 나이 29가 위험한 나이라 이 나이를 넘기면 취업이 어렵다는 꾐에 넘어가 회사에 면접을 보고 덜컥 붙어버려 한 번도 삶에서 그려보지 않은 회사원이 되었다. 한 회사에서 1년가량. 두 번째 회사에서 1년 반 동안을 버텼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나는 항상 ‘이 곳은 내 가 있을 곳이 아니야’라고 생각했고 ‘내 작품에 공연하게 되는 순간 관둬야지’를 가슴에 새기고 다녔다. 그런데 그런 날은 쉽사리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있을 곳이 아닌 장소에서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닌 일을 하며 돈을 벌며 시간을 지체한다는 기분에 초조해졌다. 친구들이 나보다 먼저 입봉 하거나 좋은 작품에 출연하거나 하면 조급증은 더 심해져갔고, 공연장에 가면 내가 아직 시작도 못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미련으로 마음이 아파 공연을 보러 가지도 않은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의 나는 회사를 관두지 않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떤 제의가 들어왔다. 올라갈지 모르겠지만 작품을 한번 써보지 않을래? 회사생활을 하며 나는 기약도 없는 작품의 테이블 작업을 시작했다. 학교를 다닐 때 하루 3시간 쓰기를 해보라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나 퇴근 후 모든 시간과 주말을 글쓰기에 바쳤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래도 시간이 있었던 학교를 다니던 기간에는 하루 3 시간 쓰기 따위 절대 되지 않았는데 회사를 다니며 짬짬이 엉덩이를 붙이고 절실함을 담아 글을 쓰니 하루 3 시간 쓰기가 그냥 되는 것이었다. 그 기간 나는 뭔가 꺠달았다. 나는 돈이 벌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은 게 아닌 것 같다. 그냥 쓸 수 있으면 되는 것 같다. 그때부터였나. 회사생활이 견딜만해졌다. 나는 3시간 쓰기를 계속 이어나갔고, 2015년 봄 마감을 했고, 2015년 10월 회사를 퇴사한 후, 2015년 12월 입봉을 했다. 졸업으로부터 3년 만에. 그리고 이 일을 꿈꾼지 14년만의 일이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쓴다는 행위는 이렇듯 가끔 어떤 인생을 구하기도 한다는 것을. 


 돌아가서, 패터슨에서 이런 위로가 있다. 글을 쓰는 행위만으로 그의 삶이 의미가 생겼다. 시를 쓰는 시간. 이 시간만큼은 어쩌면 무미건조한 일상을 반복하는 버스 운전사일 수도 있었던 그가 특별해지는 순간이다. 그는 그 시를 누가 읽건 말건, 그 시가 출판되든지 말든지, 그저 썼다. 쓴다는 행위 자체가 그저 중요했으므로… 


 패터슨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즉, 어떤 메시지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에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방식까지 그 주제와 닮아 있다는 점이었는데 예를 들자면 일상. 요일의 반복. 같은 노선을 매일 운행하는 버스. 소도시. 아내의 흑과 백의 무늬. 그리고 그 안에서의 반복이 조금씩 변주가 된다는 지점. 마치 바리에이션의 주제가 제시된 다음 그 주제를 조금씩 변형하여 반복하는 악곡의 형식처럼 말이다. 패터슨에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 조금의 변주들이 재미있었다. 예를 들면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는 자세. 조금씩 늦거나 이르거나 하는 기상시간. 아내가 싸주는 도시락의 메뉴와 매번 다른 아내의 사진. 등등… 


 그런 탓에 이 이야기는 그렇다 할 클라이 막스나 위기가 없다. 굳이 위기를 찾아보자면 아마도 그가 시 노트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지점일 텐데. 이 지점 역시 주제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만약 아내의 말대로 출판되어 사람들을 만나고 그가 어떤 명성이나 악평을 듣게 된다면 그저 쓴다는 행위를 사랑해서 쓴 시들의 의미가 사라져 버릴 테니까. 영화는 아마 필연적으로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시련이 한차례 폭풍처럼 지난 후 패터슨은 새로운 노트에 비로소 더 진짜 시를 쓸 수 있게 되기도 했으니까.


 밤 12시 30분 심야로 들어가서 본 영화. 나와 단 한 명의 관객뿐이었던 영화관. 미세먼지를 뚫고 만났던 패터슨은 좋았다. 참 좋았다.  




뱀 다리 1) '번역이란' 우비를 입고 샤워하는 것. 이란 말에 깊은 공감!

벰 다리 2) 텅 빈 페이지는 무한한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무언가 써야 한다는 심각한 압박이 되기도 한다.

나에게는 텅 빈 페이지보다 워드의 깜박이는 커서가 가끔 그런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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