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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an 28. 2018

영화_코코

리멤버 미. 용서는 못하더라도 잊으면 안 되잖아요

       기타를 치는 미구엘이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 포스터보다 이 장면이 예쁘다.


 코코.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코코' 여야 했을까? ‘코코’는 주인공 미구엘의 할머니의 애칭이다. 미구엘이 ‘죽은 자의 날’에 죽은 자의 세계를 여행하고 온 후 몇 대에 걸친 세대 간의 갈등을 해결하고 할머니에게 상실의 기억이었던 ‘아빠’를 되돌려준다. 아마도 그래서 이 영화가 미구엘이 아니라 ‘코코’가 되었던 게 아닐까 싶다. 미구엘이 여행을 통해 얻은 것은 단순히 본인의 ‘꿈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 뿐만 아니라 ‘가족 간의 화해’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 갈등의 시작이며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아마도 코코였으므로…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는데 픽사가 아니라 디즈니 로고가 나타났다. 주변에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코코 언제 해?’ 등등의 어린 관객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곧 잠잠해졌다. 난데없이 ‘겨울왕국’의 등장인물들이 스크린에 등장했으므로. 엘사와 안나는 코코만큼 어린이 관객들을 열광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러고 보니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했다고 들었다. 찾아보니 <코코>가 디즈니와 픽사가 공동으로 제작한 첫 영화라고 했다. 안나와 엘사. 그리고 올라프가 등장해서 그들이 왕국에 전통이 없음을 계속 강조했다. 그러면 우리만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면 된다! 가 주제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뒤에 이어지는 <코코>와 너무나 상반되는 주제였다. 두 이야기를 상반되게 배치함으로써 코코를 더 돋보이게 하게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했음을 인지시켜주는 장치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는 아닌 것 같지만… 과연 그 의도가 궁금하다. 그리고 겨울왕국은 백인들이 잔뜩 등장했는데 코코는 백인이 아닌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다양하게 등장한다. 이것 역시 너무 상징적으로 보였는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걸까? <모아나> 정도로 인종차별이 틀에서 벗어나려는 디즈니의 몸부림과 앞으로의 작품 방향성을 야심 있게 표현하는 도구였던 걸까?


 뭐. 거두절미하고…. 올라프가 주인공이 되어 전통 없음을 이야기하는 짧은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었지만 노래가 나오는데 갑자기 너무나 행복한 거였다. 역시 직업은 못 속여.라는 생각에 앞서. 그저 너무 행복했다. 나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디즈니의 음악들을 사랑한다. 거기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서 <코코>를 볼 부드러운 마음이 준비되었다. 그냥 이 영화를 보면서는 행복해지면 될 것 같았다. 


 미구엘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할머니 대부터 이 가족에게는 음악이 금지되었다. 음악을 하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떠나버린 어디서 죽었는지 알 수도 없는 할아버지 때문이다.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구엘은 꿈을 꾼다. 그리곤 어떤 단서를 통해 당대 최고의 가수 에르테스토가 자신의 아버지라 굳게 믿게 된다. 그리고 찾아온 ‘죽은 자의 날’. 미구엘은 그날 에르네스토의 기타에 손을 댔다가 죽은 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그곳은 살아있는 자들이 기억하는 한 죽은 자 들이 살아가는 다른 세상이었다. 


 여기에서 방점은 살아있는 자들이 기억하는 한.이다. 즉, 살아있는 자들이 그들을 잊으면 죽은 자는 죽은 자의 세계에서 또다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진정한 죽음 말이다. 미구엘은 그곳에서 자신과 가족들이 기억하고 있는 죽은 가족들을 만난다. ‘죽은 자의 날’에 제사를 지내며 항상 봐 왔던 얼굴들이라 뽀얀 해골 모양을 하고 있는 가족들까지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심미안이라니. 가족들은 자신들을 위해 그날 밤 제사상을 차린 살아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살아있는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의 길을 건너다 미구엘과 마주쳐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가족들은 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미구엘을 무사히 집에 보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코코는 죽은 자의 축복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을 위해 자신의 핏줄이라 굳게 믿고 있는 찢어진 사진 속 그 사람. 할아버지로 추측되는 에르네스토를 찾아 헤맨다. 


 미구엘은 여행 도중 이젠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많이 지워져 누리끼리하고 앙상해진 몰골을 하고 있는 헥터를 만난다. 그는 미구엘이 에르네스토를 만나는 걸 도와주겠다고 말한다. 조건은 단 한 가지. 자신의 사진을 재단에 올려달라는 것. 마지막으로 딸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그 후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아주 뻔하지만 그래서 명쾌한 플롯으로 꽉 짜여있었다. 생각해보니 필요 없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고, 제시되었다면 모두 어떤 필요에 의해 제시된 것이었다. 마치 안톤 체호프의 총처럼. 이야기는 따뜻한 반전도 가지고 있다. 나는 직업상 무엇인가를 볼 때 분석하는 버릇이 있는데 (분석의 자세로 영화를 보았다면 아마도 예측 가능했을) 이 영화는 그런 생각 없이 그저 행복하게 보.았.다. 오랜만에 어린이의 마음으로 그저 재미있게 그 세계를 느낄 수 있어 즐거웠다. 


 사실 디즈니에서 죽음을 다룬 다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하게 보이기도 했다. 어린이들이 주 관객이 되는 애니메이션에 죽음이라니…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따뜻한 시선으로 죽음이라는 주제를 잘 전달한 것 같다. 그리고 그저 꿈을 좇는 소년에 불과했던 미구엘이 죽은 자의 세계를 경험하기 전과 경험하고 난 후에 보여주는 성장이 참 감동적이었다. 미구엘은 그 힘으로 몇 년 동안 쌓은 음악과 가족 간의 앙금을 풀고, 세대를 뛰어넘은 가족들 간의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 어떻게 작가는 저런 생각을 했을까? 


 아, 살짝 여담이지만 <코코>를 보는 내내 권정현 작가의 단편소설 <라빠빠>가 생각이 났다. 짧은 찰나에 산 자가 죽은 자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지점. 그리고 그 세계만의 법칙이 있다는 점.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죽은 자의 세계가 있다는 점에서 접점이 있어 보였다. <코코>가 죽음이라는 주제를‘기억한다’는 것을 더해 환상적인 세계를 따뜻하게 풀었다면 소설 속 라빠빠는 죽은 아내를 만나고 싶었던 한 남자의 염원 혹은 욕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치에우리디케를 사랑한 오르페우스의 금기. 돌아보지 마! 처럼가면을 벗지 마!라는 부분도 존재하고 말이다.) 하지만 코코는 그저 사랑스럽과 한없이 낭만적이고 환상적이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라빠빠 보다는 <코코>의 세계를 좀 더 여행해보고 싶긴 하다. 


 <코코>를 보면서 또 하나 행복했던 지점은 경이로운 그래픽이었다. 죽은 자 들의 세계가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펼쳐질 때. 그 벅차오름이란! 그 색채란!! 그리고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해태처럼 생긴 (ㅋㅋ) 큰 새의 위협적으로 아름다운 비주얼.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음악. 그 환상의 세계를 더 환상으로 만들어주던 음악들. 멕시코가 배경이었던 탓에 음악도 굉장히 이국적이었는데 (아마 멕시코 음악에 대한 고증도 있었을 것 같고) 환상적인 배경과 너무 잘 맞아떨어져서 그냥 거기 살고 싶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작품을 했던 나는 이 영화가 어떤 위로가 되었다. 작품을 하고 있었던 시간 동안 ‘잊혀진다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어떤 상실의 감정에 젖어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조금 홀가분해졌다. 그래 기억하면 된다. 적어도 진짜 그 사람이 죽는 순간은 모두에게 잊혀지는 순간이고,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죽지 않을 테니까… 

 


사람이 언제 죽는 줄 알아? 총알이 심장을 뚫었을 때?
아니, 누군가에게서 잊혔을 때.
- 헥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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