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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an 29. 2018

책_랩걸 (호프자런)

자신의 일을 가지고 여자로 산다는 것


 나는 과학자들이 쓴 글들을 좋아한다. 수포자에 문과적 인간인 나는 이과적 인간들만이 가지고 있는 매우 명확하고, 필요 없는 말이나 미사여구는 덧붙이지 않고,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주저하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돌려 말하지 않는 문법들을 좋아한다. 아마 그 시작은 ‘칼 세이건’이었던 것 같고, ‘올리버 색스’. 홀로코스트의 기록물을 남긴 ‘프리모 래비’가 그런 것 같다. 아! 국내 과학자도 한 분 계신다. 밀림에서 긴팔원숭이를 따라다니는 이야기를 담은 <비숲>의 저자 영장류 학자 ‘김산하’씨!(너무나 좋아해서 강연 가서 싸인도 받았다. 싸인으로 돌고래를 그려주셨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이 책! <랩 걸>을 만났다.


 <랩 걸>의 저자 ‘호프자런’은 식물학자다. 그리고 여자이며,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과학자라는 꿈을 기어이 이루고야 만 역동적인 인간이다. 이 책을 읽고 있던 나는 ‘극을 쓰는 작가’이며(나 스스로는 ‘아직 되고 싶은 것’이라고는 생각하는데 남들이 가끔 그렇게 부르니까), 호프자런처럼 여자이며, 내가 오래 꿈꿔왔던 일을 직업 삼고 싶은 조금 소심하지만 열정적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과학자’라고 쓴 부분을 ‘작가’ 라고 치환하거나, ‘실험실’이라고 쓴 부분을 ‘작업실’이라고 치환하거나, ‘수백번 혹은 수천번의 실패와 반복 끝에 얻은 연구 결과’라는 부분을 ‘작품’으로 치환하면 모두 말이 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굉장히 몰입해서 그녀가 내 나이 이전까지 살아왔던 과정들은 ‘내가 겪은 것’처럼 읽었고, 아직 내가 겪지 않은 삶의 부분은 앞으로 ‘내가 겪게 될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읽었다. 


 그리고 나는 좀 유별난 식물 애호가다. 심지어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베란다에 천해향나무. 블루베리 나무. 살구꽃 나무와 함께 지내고 있다. 그것들이 꽃을 피웠다 떨어뜨렸다. 열매를 맺는 걸 구경하는 게 즐겁다. 요즘은 우리 집 천해향이 한겨울인데 꽃을 피우더니 (지난여름에도 한번 무성하게 꽃이 피었다가 다 떨어졉렸는데) 갑자기 두 개가 열매로 자라나고 있다. 지금 엄지손가락 정도로 자랐는데 정말 아주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조금씩 자라고 있다. 이 책을 읽다 깨닫게 되었는데 아마도 실내라 불을 켜놓고 살다 보니 일조량을 착각해 지금이 열매를 맺어도 좋을 계절로 착각한 모양이다. 아마도 같은 이유로 살구꽃은 지난해엔 이파리 하나 없는 하얀 꽃이 핀 다음에 파란 잎이 돋았는데 올해는 한겨울에 약간의 꽃이 피더니 초록빛 잎이 자라는 것이 동시에 진행 중이다. 블루베리는 재작년 너무 무더웠던 여름 탓에 탈진했는지 다 죽어가는 걸 겨우 살려놓았다. 나는 아직 식물 공부가 더 필요한 상태라서 나무가 죽어가는 걸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몇 개의 나뭇가지를 죽여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몇 개의 강한 가지들은 살아남아 초록 이파리를 달고 있다. 작년에는 열매를 못 보았는데 올해는 볼 수 있으려나. 나무 말고도 있다. 아메리카 블루. 보라색 꽃이 피는. 이름 모를 무성한 초록이… 아침마다 햇빛 들어오는 베란다에서 내 식물 친구들에게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주변인들에게 가끔 이런 재미난 일을 자랑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해서 심심했는데 호프자런씨가 책 말미에 괜찮다고 했다. 위로가 된다. 그리고 우리 고양이 ‘나무’는 내가 그런 일과로 아침을 시작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거면 됐다.  


계속 나무에 관해 이야기하고, 날마다 벌어지는 나무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자. 사람들이 눈을 굴리면서 부드럽게 당신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주면 만족스럽게 웃음을 웃자. – P.404



1. 자신의 일을 가지고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녀는 그녀 자신이 ‘과학자’라는 사실에 대해 단순히 직업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워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처럼 명확하고 결과론적인 학문에서 성별이 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사람들은 일단 그 직업을 남자들의 직업이라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아마 그녀에게 주어진 수식어 중 풀부라이트상을 세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과학자라는 것만 봐도 명백해진다. 그녀는 과학자로 살기 위해 많은 편견들과  맞서 싸워야 했던 거다. 가장 명확한 예로 그녀가 임신한 몸을 이끌고 실험실에 나와 일하는 것을 보고 학과장은 그녀의 남편을 통해 그녀를 실험실에서 추방했다. 전도유망한 교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그녀는 연구자금을 위해서라도 그 교수 자리가 너무나 절실했던터라 절망하고 또 절망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자신의 직업과 결혼과 삶을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로서 전문직을 가지고 결혼과 삶과 출산을 감당하는 것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그녀는 과학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어렴풋이 그걸 알고 있는 듯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108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P.397

그녀는 그것들 이겨내고 과학자가 기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나도 그녀처럼 내가 ‘글을 쓰겠다는 꿈’을 꾼 순간부터 왠지 보통의 여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실제로 보통의 내 또래들의 삶의 속도보다 한 템포 느리게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 등을 서슴없이 해내버리기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눈앞에 있고, 그것들의 본질에 대해 주변 사례들에 의해 조금씩 알게 된 탓도 있는 듯하다. 내 주변의 그녀들은 거의 대부분 결혼과 출산을 지나며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잃어버렸다. 꿈을 꾸고 있지만 되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거기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고들 하지만 나는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이 그것보다 큰 모양이다. 하지만 나도 그것들에 대한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조금 느리게 가도 괜찮다면 그러고 싶을 뿐이다. 엄마가 되고 출산을 하고. 그 와중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자주 고려되지 않는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는 일들이 놀랍게도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니까.  


 결혼과 출산은 그녀의 삶 역시 뒤흔들어 놓았다. 저절로 일어나고 닥치면 어떻게 하면 알게 되겠지라고 여겼던 엄마가 된다는 감각이 그녀에게는 없었고  태어난 아이를 과연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임신기간 동안 실험실에 나가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이를 원망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너무나 당연하게 모성애를 강조하는데 그건 절대로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나의 생각이 역시나 사실이었다. 이 책에는 결혼을 한다. 출산을 한다.라고 짧게 표현되는 일들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서술을 한다. 그저 가정주부로 아이를 가지고 엄마가 되는 것과,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도중. 더군다나 매우 중요한 시기에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는 삶에 대해 작가는 괴로워하고 고민한다. 그녀 역시 여자로서의 삶과 직업. 둘 중에 하나를 놓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그러지 않고도 그걸 억척같이 해냈던 한 과학자. 나 역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을 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와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2. 하고 싶은 일을 직업 삼은 인간으로서의 그녀.

나는 내 처음으로 마침표를 찍었던 습작 작품을 기억한다. 10분짜리 뮤지컬이었는데 음악까지 붙어서 관객 앞에서 발표했던 그 순간을 아마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며 글 쓸 기회를 기어이 얻어내고야 만 그 날을 기억한다. 어쩌면 이루어질지도 모를 꿈에 대해 가슴이 벅차서 잠을 설쳤던 그 날을 기억한다. 배우 스텝들에 둘러싸여 생애 첫 리딩을 했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의 장소, 날씨. 바람. 내가 입었던 옷까지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입봉하던 그 겨울 어느 날을 기억한다. 관객석에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었지만 그 날 나는 오로지 혼자였다. 너무나 꿈꾸었던 날이라 통곡할 줄 알았지만 나는 무사히 공연이 올라갔다는 안도감과 이어서 펼쳐질 내 인생 첫 공연이 아무 일 없이 치러질지에 대한 걱정으로 긴장만 가득했던 그 공연장을 기억한다. 이 수많은 감정들을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만의 오팔’을 손에 넣던 날에 대한 기억이다.


눈물 몇 방울이 볼을 적셨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도 아니어서 우는 것인지, 혹은 누구의 딸도 아닌 느낌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래프에 나타난 그 완벽한 선 하나가 너무도 아름답고, 내가 앞으로 영원히 그 선을 가리키며 나의 오팔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108

 어느 순간 나는 그녀를 인생 선배가 먼저 간 길을 보듯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작년부터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일주일에 대여섯 시간씩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가끔 그녀처럼 국가에서 지원하는 경비를 받기 위해 말도 안 되는 기획서를 써내기도 하고 오로지 호기심에 근거한 연구(이야기)에 힘을 쏟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입봉만 하면 뭐든 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비슷했다. 타이틀을 달아도 여전히 돈 걱정을 하며, 다음이 없을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이런저런 알바를 한다. 일단 뛰기 시작하면 명쾌한 다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오리무중인 현실. 지금 나는 이 지점에 있는데 그녀도 이런 지점을 지나 먹고살만해지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고 하니 인내하며 내가 이 자리에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3. 나는 행복하고 싶다.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힘겹게 이겨냈지만 아들을 통해 인생의 또 다른 보물을 찾은 것처럼 내 인생에도 언젠가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때까지 좋은 사람으로, 그리고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좁은 시야로 인생을 살기보다 백 년 이백 년 긴 세월을 사는 나무처럼 조금 멀리 보고 내 기쁨과 슬픔들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끔 힘들 때 ‘아. 이건 딱 3일짜리 슬픔이야.’ ‘이 정도 아픈 거면 눈물 3방울만 흘리면 끝나겠어’ 같이 남의 일 보듯 나 자신을 보면 조금 견딜만해지기도 하고, 기쁜 순간에는 기쁨에 취해 자만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느낌이 드니까. 


 마지막으로 나도나만의 정원에서 나만의 나무들에 둘러싸여 살면 행복할 것 같다. 그것들이 자라는 것을 보고 가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 계절마다 색다르게 기쁠 것 같다. 나보다 오래 살 것들과 함께 지내는 것은 이상한 기분이겠지만… 그래도 좋다. 이건 좀 웃기지만 진지하고도 오래 된 내 두 번째 꿈이기도 한데 나는 정원사가 되고 싶기도 하다. 


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내내 여자는 히잡을 써야 하는 나라 이란에서 필즈상을 받은 여성 수학자. ‘마리암 미르자카니’가 떠올랐다.(얼마 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안타깝다.) 그냥 수학을 하고 싶었을 뿐인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혁명적이고 투쟁적인 인생을 살아내야 했던 그녀. 나는 ‘마리암 미르자카니’와 <랩걸>의 저자 호프 자런을 통해 누군가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그냥 나는 나만의 길을 가면 되는 것!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까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비커와 온도계와 접지봉을 관리할 것이다. 내가 은퇴할 때 전부 다 쓰레기 취급당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P.272




뱀 다리 1) 

카랑고에를 키우면서 삽목이란 것을 처음 알고 너무 경의로웠다. 더 신기한 것도 있었는데 그건 바로 접목이었다. 감나무를 다른 개암 나뭇가지 같은 것에 잘 접착시켜놓으면 밑동은 개암나무였던 것이 감나무가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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