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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미 Jan 29. 2018

[책] 랩걸_호프자런 : 내게 온 문장

내게 온 문장

호프자런_랩걸


몸집은 작지만 결의에 찬 소녀였던 나는 나의 일부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법을 배우면서도 나의 본질을 배반하지 않기 위한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길을 걸었다. –P.30


우리 마을에서 아빠는 그냥 과학자가 아니었다. 아빠는 마을 유일의 과학자였다. 그리고 과학자라는 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아빠의 정체성이자 신분이었다. -P.34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내 실험실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할 수도 있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 돌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나에게 밀어닥친 그 모든 어리둥절하고 달갑지 않은 일들(세금 신고, 자동차 보험, 자궁경부암 검사 등)은 실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아무 상관도 없어진다. 전화가 없는 그곳에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아도 마음 상하지 않는다. 문은 항상 잠겨 있고, 열쇠를 가진 사람은 모두 아는 사람들이다. 바깥세상이 실험실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실험은 내가 진짜 나일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P.36


과학은 또 한때 벌어졌거나 존재했지만 이제 존재하지 않는 모든 중요한 것을 주의 깊게 적어두는 것이야말로 망각에 대한 유일한 방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P.49


연꽃 씨앗의 껍질을 열고 배아를 성장시킨 과학자들은 그 껍질을 보존했다. 그 껍질을 방사성 탄소 연대법으로 측정한 과학자들은 그 연밥이 중국의 토탄 틒에서 2000년을 기다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동안 이 작은 씨앗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버틴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작은 식물의 열망이 어느 실험실 안에서 활짝 피었다. 그 연꽃은 지금 어디쯤 있을까. -P.52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두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나는 병원 일을 그만두고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포기했다. 그 대신 나는 내 삶을 구하기 위해 연구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남자에게 구속되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부터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일했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쳘피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P.79


 일단 첫 뿌리를 내리고 나면 그 식물은 덜 추운 곳으로, 덜 건조한 곳으로, 덜위험한 곳으로 옮길 희망(그 희망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다 할지라도)을 포기해야 한다. 서리와 가뭄과 굶주린 입이 찾아와도 그로부터 도망갈 가능성 없이 모든 것을 직면해야 한다. 그 작은 뿌리는 자기가 앉아 있는 그 장소에 몇 년, 수십 년, 혹은 수 백 년의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점칠 기회를 딱 한번 가진다. –P.81


 눈물 몇 방울이 볼을 적셨다. 내가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도 아니어서 우는 것인지, 혹은 누구의 딸도 아닌 느낌이어서인지, 아니면 그래프에 나타난 그 완벽한 선 하나가 너무도 아름답고, 내가 앞으로 영원히 그 선을 가리키며 나의 오팔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우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날을 위해 일하고 기다려왔다. 이 수수께끼를 해결함으로써 적어도 나 자신에는 무언가를 증명했고, 마침내 진정한 연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그러나 그 큰 만족감에도 그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외로운 순간으로 기억되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좋은 과학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깨달은 동시에 지금까지 알던 여성들처럼 될 기회를 이제 공식적으로, 완전히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P.108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세포 생물에서 가장 큰 공룡, 데이지, 나무, 사람에 이르기까지) 종족 보존을 위해 다섯 가지를 성취해야 한다. 성장하고, 번식하고, 재생하고, 자원을 비축하고, 자기방어를 하는 것, 스물다섯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내가 번식하는 일은 복잡하기 그지없거나 심지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가임기간, 자원, 시간, 욕구 그리고 사랑이 모두 제시간이 제대로 벌어질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돼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국은 성공해왔다. -P.113


 내가 하는 종류의 과학은 ‘호기심에 이끌려서 하는 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은 내 연구는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제품이나, 유용한 기계, 환자에게 처방할 수 있는 약, 가공할 만한 무기 혹은 직접적인 물질적 이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만일 내 연구가 간접적으로 저 위에 든 예 중의 하나로 이어진다면 그것은 미래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손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나라의 예산에서 내 연구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다. -P.176


 잠깐씩 연애에 발을 담가본 결과 나는 사랑의 영역에서는 할인 대방출 코너에 방치될 종류의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내가 만난 독신남들은 왜 내가 계속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차피 몇 시간에 걸쳐 식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나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른이 되면 이럴 것이라고 내가 접해온 이미지들과 비교해서 내 삶은 모든 면에서 엉망진창이었다. -P.185


 실험실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악몽은, 내 구체적인 꿈이 그것밖에 없었기에 더 공포스러운 일이었다. 대학학을 다니는 동안 나는 진정한 학자가 되면(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문에 내 이름이 걸린 시험실을 갖는 것이었다) 모두가 나를 믿을 것이고, 다연히 과학적으로 큰 돌파구가 열려서 평탄한 인생을 걷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이 보상에 대한 확신으로 나는 석 박사 과정을 달리다시피 해서 마쳤다. –P.246


 우리 모두 일하며 평생을 보내지만 끝까지 하는 일에 정말로 통달하지도, 끝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은 좀 비극적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 대신 우리의 목표는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그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까 내딛을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우리의 비커와 온도계와 접지봉을 관리할 것이다. 내가 은퇴할 때 전부 다 쓰레기 취급당하지는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P.272


그럼에도 그는 상냥하고, 안정되고, 사랑을 베푸는 성격은 내가 그것들을 발견하고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고 결심하기 전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보물이었다. -P.295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 온 실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닿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으로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P.325


 모든 가문비나무는 가을마다 똑같은 일을 한다. 첫서리가 내릴 것에 대비해 성장을 멈추는 ‘버드 세트’를 실행하는 것이다. 노르웨이 과학자들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묘목 시절부터 같은 숲에서 나란히 자라난 이 수백 그루의 나무들 중 찬 기후에서 배아 시절을 보낸 나무들은 어김 없이 다른 나무들보다 2~3주 먼저 버드 세트를 시작해서 더 길고 더 추운 겨울에 대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연구의 대상이 된 모든 나무들은 동일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씨앗이었을 때 겪었던 차가운 기후를 기억한다는 결론이다. 심지어 이렇게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상황인데도 말이다. -P.330


 온몸이 젖어추위에 떨면서 진흙탕에서 헤맬 때면 주변의 식물들은 그 비참한 날씨를 그냥 견디는 정도가 아니라 그 속에서 번창하고 있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뽐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P.352


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기 떄문에 과학을 잘한다. 너무 똑똑하다는 말을 들었고, 단순하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너무 많은 일을 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해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여자이기 떄문에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말도 들었다. 나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일찍 죽을 것 이라는 말도 들었다. 너무 여성적이라는 꾸지람을 들었는가 하면 너무 남성적이어서 못 믿겠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넘 예민하다는 경고를 받은 적도 있고, 비정하고 무감각하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한 사람들은 모두 나만큼이나 현재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런 말을 반복해서 들으면서 내가 여성 과학자이기 떄문에 누구도 도대체 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상황이 닥치면 그떄그때 내가 무엇인지를 만들어나가면 되는 값진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동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나도 그들에게 충고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다음 두 문장을 되뇐다. : 이 일을 너무 진지하게 받으들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야만 할 때를 빼고. -P.397


그리고 

나만 알고 싶어서 옮기지 않은 최고의 페이지 - P.366~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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