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연미 Jun 21. 2018

[영화] 허스토리

“재판에 졌어도 내 마음은 지지 않아.”


교과서 속 역사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순간’ 

 여기 한 여고생이 있다. 오늘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직접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이다. 교실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할머니를 보자 소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얼마 전까지 소녀의 집에서 집안일을 도와주던 도우미 할머니였기 때문에.  

 나는 청산되지 않은 한일문제이 관심이 많다. 사실 나에게도 역사가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우연하게 자이니치로 일본에서 활동을 하시는 김수진 연출님의 <신주쿠양산박>이라는 극단을 만나게 되면서 그저 역사였던 것이 내 친구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의 역사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크게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에게 역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랑 가까운 이야기. 나의 이야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되었다. 극 중 소녀도 아마 그런 순간을 맞닦드려 자신도 모르는 눈물을 흘렸으리라…  

 얼마 전까지 나 역시도 위안부 문제를 다룬 희곡을 썼었기 때문에 이 영화에 관심이 갔다. 나도 테이블 작업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어왔는지, 왜 할머니들이 수요일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집회의 역사를 지닌 수요집회를 이어나가시는지, 할머니들의 증언들을 수도 없이 많이 접했다. 강연도 찾아다녔고,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에도 방문해보면서… 참 안타까운 것은 내가 이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2분이 세상을 뜨셨다. 이제 남아계신 분들은 28분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제작이 반갑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이 논의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야기는 힘이 세니까.  


역사적 사건이 이야기가 되기까지 

 테이블 작업 때 접했던 자료 중에 관부재판에 관한 것이 있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고백 이후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위안부 관련 이슈의 실체가 드러났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최초의 미투 운동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안부 피해 사황을 확인하기 이해 신고 전화를 설치하고 할머니들을 기다렸지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당시 우리 사회가 할머니들을 대했던 싸늘한 시선이 여기에서도 읽힌다. 할머니들에게 참 힘드셨겠어요. 고생하셨지요.라고 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수치니, 화냥년이니… 하는 말들로 그녀들을 두 번 상처 입혔다. 그래서 할머니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인권을 위해 스스로 연대하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도전했던 재판 중 하나가 관부재판이었다. 일부 승소했지만 2003년에 와서 일본에서 재판 결과를 뒤집었다. 하지만 ‘일부 승소’ 그것에 큰 의이가 있는 재판이었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 판결문 중 그들의 명명했던 위로금.이라는 단어가 지금도 화가 난다. 피해보상금이 아닌 위로금. 그들은 그렇게 그 와중에도 슬쩍 책임을 회피해버린 것 같아서 말이다. 허스토리는 이 관부재판의 과정을 다룬다.  

 영화는 재미보다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에 좀 더 취중 한 듯 보인다. 그래서 조금 묵직하고 웃음기를 쫙 뺸 것 같은 느낌이다. 할머니들의 대사 중 실제 증언들도 많아 보인다. (내가 보았던 인터뷰들과 겹치는 내용이 많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작업을 해 나갔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영화의 진행은 재판을 위해 팀을 꾸린 할머니들과 그들과 연대하는 한 여성 사업가. 그리고 할머니들을 돕는 변호인단의 여정으로 이루어진다. 몇 번의 재판 장면이 반복되고 매번 불성실하게 임하는 가해국의 태도가 이야기가 쌓여가며 조금은 숙연해지는 과정이 보인다. 재판 결과를 궁금해하는 지점에서 이야기적 재미가 더해지지만 재미면에서는 조금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그 나이 든 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 그들이 할머니들의 인생을 자신들의 입을 통해 발화시킨다는 사실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감동이었다. 


영화 박열. 아이캔 스피크. 눈길. 귀향. 그리고 허스토리 

 재판 과정이 이어지며 펼쳐지는 이야기 구조가 박열과 매우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열이 아주 유별나고 재미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러브스토리로 이야기의 재미를 더했다면 허스토리는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인 느낌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위안부 소재로 만들어졌던 아이캔 스피크도 떠올랐다. 어떻게 역사적 비극이 한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나 하는 것을 이야기에 가장 잘 녹인 위안부 소재 작품이 아닌가 싶다. 결코 눈물을 짜지 않지만 웃으면서 울게 되는 영화. 이야기로서의 매력은 아이캔 스피크가 한층 더 있었던 듯하다. 

눈길과 귀향은 과거 재현에 취중 한 작품인 것 같다. 어떤 소재로 가장 무난하게 생각해낼 수 있는 이야기. 나도 작품을 쓰는 사람으로 이 지점을 굉장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어떤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고 반복하는데 지친 것 같다. 이미 누군가가 많이 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같은 소재라도 다양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통해 사건을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  


왜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을 개인이 하는가? 

 영화로 돌아가서, 나는 위 지점이 가장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뭐 사실 위안부 관련 공부를 나 스스로 하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일 양국 다 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 없다. 각자 위치에서 그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리액션을 할 뿐이다. 여기에서 이 문제를 진심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피해 당사자들과 그들과 연대하는 민간단체들 뿐이다. 91년부터 싸웠던 긴 투쟁이 아직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는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의 입장에서는 1965년 박정희가 끝내버린 일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가치가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저 할머니들이 돌아가셔서 이 이야기가 더 이상 회자되지 않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영화에서도 나라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할머니들을 위해 발 벗고 뛰는 사람은 여행사 사업을 하는 문정숙. 개인이다.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을 한 개인이. 여성이 하고 있는 셈이다. 나라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해결할 생각이 없었던 걸까?  

 실제로 수요집회를 나가보면 어른들보다 어린 학생들이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연대해야 하며, 이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는 것. 이렇듯 어쩌면 나라보다 어린 학생들이 더 어른인 것 같다.   


우리는 왜 지금. 이 시대에. 이런 영화를 봐야 하는 걸까? 

 앞에 언급했듯이 갑자기 어떤 이야기가 나에게 와서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경우들이 있다. 생각보다 일제 강정기를 겼었던 시기가 오래되지 않았고, 민주화를 이루면서 우리는 한 번도 과거를 제대로 청산한 적이 없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기억해야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이 계속해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의 명예도 달려있지만 우리에게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물려주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일본에게 원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러서는 안 되는 범죄에 대한 정부차원의 사과와 우리 역사를 우리 아이들에게 똑바로 가르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키워주기 위해서다. 위안부 이야기가 너무 고루하고 그만해줬으면 좋겠다는 일각의 시선도 있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또한 알고 있다. 좋은 이야기는 오래 살아남아서 그것을 계속 기억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소재로 책도 만들고, 영화도 만들고, 공연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할머니들은 아직 투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재판에서 패소하고 송신도 할머니가 하셨던 말을 남긴다.

 “재판에 졌어도 내 마음은 지지 않아.”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